봉사와 섬김을 빛내는 포용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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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사와 섬김을 빛내는 포용력

김재성 교수(합신)

한국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대형 병원 원목실 활동을 들여다보면, 남을 
포용하는 연합사역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단 번에 알 수 있다. 일부 교회들은 
거대한 교세를 근거로 하여 충분한 재정과 인원을 확보하고 있어서 병원 전도
사역에 기여할 충분한 여력이 갖춰져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교회들은 아
예 교역자나 성도들을 팀으로 구성해서 독점적으로 병원 전도활동을 주도하고
자 시도한다는 점이다. 마치 자신들의 지교회처럼 운영하려 하고, 예속된 사
무실처럼 경영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병원이란 여러 지역 교회에서 오는 환자들과 가족들이 모이는 곳이므
로 중립적으로 운영 관리해야할 특수목회 현장이다. 원목실의 가난한 형편과 
처지에서는 후원을 보내주는 주변 교회들의 지나친 요구에 난감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초교파로 운영되는 신학교육 기관들이나, 사회복지 시설들에서도 어떤 특정
한 교회중심으로 행사를 주도하
려는 현상은 대동소이하다. 일단 자신이 섬기
는 교회를 떠나서 밖으로 나오면, 그 지역과 그 단체의 형편을 고려하여 열
린 마음으로 이름 없이 후원하고 자신들을 감추는 훈련이 필요하다. 낮아져야
만 포용력이 갖추어진다는 말이다.

세계 선교 현장에서 이러한 자기 교회중심의 독선적 행태는 우려를 넘어서 
심각한 문제를 자아내고 있다. 특히 북한 선교에 열심을 내고 있는 각 교단들
이 앞으로 연대감을 더욱 증진시키지 않는다면, 정파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움
직이고 있는 세속정치가들의 원초적인 행태를 어떻게 꾸짖고 가르칠 수 있을
까? 

개혁신학은 뚜렷한 교리적 특성을 갖고 있고, 선명한 성경적 강조점을 신조
로 정리하여 고백한다. 따라서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이후에 계속해서 어려움
을 겪고 있게 되는 것은 다른 신학노선과의 차이 때문이다. 종종 개혁신학에 
선 교회들이 연합 운동에서 어려움을 겪는 것은 이런 입장의 차이 때문이다. 
출신 교단의 신앙고백이 서로 다르다면 우리는 개혁신앙을 양보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신학 노선의 차이점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가 아니라면 그것은 
포용력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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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 기독교 교회는 그 본질과 뿌리가 하나이지만, 교파는 다양하게 형성
되어 왔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초대교회가 아시아 전지역과 유럽에 전파되면
서 언어가 달라지고 교회의 내외적인 요소들이 모두 다 달라졌다. 민족과 지
역마다 더 중요시 여기는 그리스도의 사역이 다르고, 그 전통이 다르다는 점
을 충분히 인식해야 한다. 

특히, 헛된 속임수를 경고한 바울 사도처럼, 이단들은 이미 그리스도를 주님
으로 고백하는 자들에게 접근하여 감언이설로 속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신
학노선이 차이가 날 때에 무조건 수용하기보다는 경계하고 주의해야 한다. 이
단들은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을 찾아가기 보다는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 기
존 성도들에게 접근하려 한다. 그 속셈이 너무나 훤히 들여다보인다. 
하지만, 이단이 아닌 한, 선교사역에 있어서 큰마음으로 협력하지 못하고 있
다거나, 섬김과 봉사의 일에 참여하여 적극적으로 복음을 증거하는 초교파적
인 연합사역에 주춤거리고 있다면 그것은 개인주의적이며, 이기적인 마음 때
문일 것이다.

그러기에 참된 기독교 신앙을 보여주는 길은 오직 봉사와 섬김의 
현장으로 
가는 길 뿐이다. 그곳에는 영광보다는 고난이 더욱 많지만, 많은 사람들이 찾
지 않는 좁은 길을 거쳐서 좁은 문에 이르게 되면 주님의 상급이 기다리고 있
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교회는 봉사와 섬김의 분야를 더욱 확대해야 하고, 더욱 교회의 
문호를 확대해야 한다. 어떤 교파, 어떤 신학대학원 출신들은 너무나 폭이 좁
아서 도무지 상대하기조차 힘들다는 푸념을 들어서는 곤란하다. 성경의 정확
무호성을 지키고 개혁신학에의 신념이 확고부동할수록 우리 주님처럼, 바울 
사도처럼 모든 이들에게 다가설 수 있는 유연함과 포용력도 함께 갖출 수 있
는 것이다. 

새 봄과 함께 씨를 뿌리는 계절에 접어들었다. 새로운 가지가 돋아나고 새 
생명이 연출되는 신비로움을 목격하는 이 계절에 우리들도 전에 못했던 일들
을 시도해 보자. 봉사와 섬김에 있어서는 그 대상과 종류를 가리지 말고 낮아
지는 일에 익숙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