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차분히 되새겨야 할 일들

0
4

교회가 차분히 되새겨야 할 일들
김재성교수

교회가 세상을 따라가서도 안되고, 따라갈 필요도 없다. 하지만, 세상 속
에 존재하는 한, 이 세상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음을 지혜롭
게 인식하고 대처해야만 한다. 인터넷 혁명이라는 사건에 관련된 테크놀로
지의 면모에 대해서 일일이 그 예를 들지 않더라도 우리 모두가 느끼는 것
이다.
일반 사회인들은 지금 엄청난 자본과 인력을 투자하여 변모된 미래를 예
측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그 변화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를 전
해 주고 있다. 「미래의 충격」이라는 책의 저자로 유명한 알빈 토플러는
우리가 변화에 대한 의지나 아무런 대처방안 이나 전략도 없이 그저 따라
가기만 한다면, 영원히 다른 사람의 뒷치닥거리만 할 뿐이다고 말한다. 그
래서 사람들은 전략을 배우고, 성공을 향한 지식을 얻기 위해서 무려 5백
만부 이상이 팔렸다는 책, 「탁월함의 추구」(In Search of Excellence)라
는 책을 앞다투어서 사고 있는 것이다.
비교적 변화가 
없는 교회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로서는 언제나 교회 안
팎의 변화를 보면서 당혹감을 감출 수 가 없다. 교회는 디지털 혁명의 시
대에 어떻게 대처해야만 하는 것인가? 피상적이고, 즉흥적인 안목이라고
하더라도, 전세계가 이렇게 급격하게 변하고 있는데, 유독 한국 교회만은
아직도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느냐는 비판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
자답해 볼 때이다.
교회 내의 모순을 탄식하는 사람들은 대형 교단의 금권선거와 정치적인
이합집산, 교회성장만 추구하는 서구식 목회모방, 일부 대형교회의 자기과
시와 개교회주의, 무인가 신학교의 비교육적인 행태, 행사 위주의 교계 모
임, 오만한 교단 우월의식, 기복신앙과 주관적 독선에 빠진 신앙주의, 목회
자들이 자기가 담임한 교회이름 보다는 기독교 단체의 장으로서 이름을 내
려는 기관운동주의 등이 여기 저기에 깔려 있다.
그러나 세상의 변화를 들여다 보면, 갈수록 오래된 권위를 과감하게 탈
피하는 경향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예컨데, 독특한 방법과 학문적으로 가
장 오래된 전통을 자랑해 오던 독일이 98년부터 대대적인 수술을 감행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13세기부터 시행해온 도제식 교육을 미국식의 일관된 체
계로 재편한다는 것이다. 대학개혁의 와중에 신학대학은 더 큰 낭패를 보
고 있다. 소득의 1%에 해당하는 종교세 부과를 7년 전부터 자유선택에 맡
겨 놓음으로서 신학교육과 루터교회에 자동적으로 지불되던 재정이 현저히
줄어들어 버린 것이다. 이제는 미국대학처럼 실용적으로 경쟁하고, 빠른 학
위취득을 독촉한다는 것이다. 박사학위를 취득하는데 10년씩이나 소요되니,
학교에는 40대 학생들이 넘쳐나서 더 이상 과거의 교육방식을 고집하지 않
기도 했다는 소식이다.
우리 나라도 계속해서 ‘개혁’이다 ‘구습혁파’다 해서 정부 조직을 뜯어 고
치는가하면, 엄청난 구조조정을 감행하였고, 입시와 학교교육의 체제와 내
용을 다 바꾸었다. 물론 훌륭하게 성공한 부분도 있고, 구호에만 그치는 부
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온 국민이 새로운 각오로 나서지 않는다면 또
다시 위기가 초래될 것이라는데 심각성이 있다.
한국 교회가 당대의 사회와 시대조류에 대처하여 조심하고 생각 해야할
일, 몇가지를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로 돌아보아야 할 사실은 한국교회 
성도들의 심성변화다. 한국장로
교회는 헌법이나 제도나 신학이나 관습이나 지난 한 세기 동안 별로 변하
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성도들의 심적 변화는 예사로와 보이지 않을 만큼
달라졌다. 예전처럼 자기가 다니는 교회에 대해서 무조건 사랑하고 충성하
던 성도들의 태도와 자세가 현저히 바뀌어 버린 것이다. 우선 살기가 각박
해져서일까? 거의 대부분 평안한 심령이 별로 없다. 요셉처럼 형통한 사람
들이 많지 않다. 그리하여, 예전 가난하게 살 때처럼, 교역자에 대한 존경
심도 사라지고, 교인들 사이의 신의도 엷어지고, 자기 교회에 대한 충성심
도 현저히 줄어들어서 툭하면 분쟁이 일어나거나, 아예 교단을 바꾸거나,
아니면 주택을 핑계삼아 교회를 옮긴다.
둘째로, 변화에 민감하지 않는 교회라 하더라도, 이제 새로운 한 해를 맞
이 하면서, 목회자의 분명한 목표제시가 새로이 가슴에 와 닿을 수 있도록
제시해야만 할 것이다. 가장 성경적이고도 바람직한 이상을 정하고, 뚜렷한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다.
셋째로, 분명한 신앙인격의 정립인데, 시간과 힘을 허비하지 않고, 오늘
에 충실하게 사는 태도의 전환이다. 특히, 
내외의 도전과 시련의 시대임을
차분하게 생각하면서, 먼저 새로운 밀레니엄이라고 흥분하는 언론이 보지
못하는 시대인식이 있어야 한다. 서기 2천년에 대해서 마음을 가다듬어 보
자. 시간에 대한 기독교적인 전망으로 볼 때는 크로노스 (연속선상의 시간,
일반적인 시간)이나, 카이로스 (때, 시점, 혹은 기회의 의미를 담고 있는 시
간) 나 모두 다 중요하게 성경에서 사용되었음로, 특별히 서기 2천년의 시
작에 대해서 다른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시간은 모두 다 주님의 지
배하에 있으며, 어느 시대든지 주님의 지배하에 있으므로, 오늘이라는 시간
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기독 신자의 바른 태도일 것이다.
제 2차 세계 대전 직후, 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였던, 허버트 버터필드
는, ‘기독교와 시간’ 이란 책을 1950년에 펴낸 바 있다. 절망의 시대를 이기
는 길이 무엇이었던가? 그는 다음과 같이 토로했었다: “매 순간은 아주 소
중한 것이다. 모든 순간이 “종말론적”이 되어진다.”
오늘의 시간에 충실하면서 현재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오늘이 중요하다.
지금이 가장 중요한 시간이다. 성경에도 지금 (nun)
이라는 단어가 강조 되
어 있다. 다시 말하면, 지금이라는 시간을 가장 소중하게 사용하라는 것이
다.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벧전 2:10). 그리스
도 안에서 지금이란 시간은 매우 중요하다. 세상의 분위기에 현혹되지 말
고, 오늘, 지금 성실하게 살아가자. 보람있는 일이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