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가장 먼저 다수결의 원칙에 따르는 민주제도를 도입한 기관이
교회다. 그러나 최근의 경향을 보면, 교인들의 의견을 집결하는 일이 결코
가볍게 지나칠 일이 아니다는 걱정을 하게된다. 교회의 회의란 예배의 연
장선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어떤 사안에 대해 결정하도록 섬기는
일인데도, 성도들에게는 그런 인식이 실제로 체득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
을 느낀다. 본 교단 내, 서울지역의 한 교회에서 교인들이 담임목사의 재정
운용 실패를 이유로 들어서 사임을 요청하는 일이 발생하였기에 걱정이 앞
서서 하는 말이다.
교인들이 권한(?)을 행사하는 것은 교회헌법에 규정하고 있다. 주지하다
시피, 세례교인들이 참여하여 한 해의 재정을 결정하고, 재산문제를 다루는
권한을 부여하였다. 그리고 각종 인사에 관한 결의권을 행사한다. 담임목사
의 청빙과 장로, 안수집사, 시무권사의 선출에서 3분의 2이상을 받도록 되
어있다.
그러나, 민주제도가 귀족주의나 전제주의보다 탁월하고, 자본주의가 공
산주의보다 월등한 제도이긴 하
지만, 언제나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다. 각
교회마다 민주적인 절차와 철저한 책임의식을 발휘하고 있는가를 자성할
때이다. 먼저 교인들이 군중심리에 휩싸이게 되면, 다수의 횡포를 통해서
억울하게 목회자에게 대항할 가능성이 많다. 흔히, 목사와 장로 사이에 관
계가 악화되면, 인간적인 감정싸움으로 번져서 교회의 일반성도들도 양분
된다. 따라서 교회의 회의시간에 이러한 시각차가 의견대립으로 노출되어
지기 쉽다. 회의란 합의를 도출하기 위한 고도의 예술인데, 도리어 자기 의
사를 관철하기 위한 투쟁의 장소로 변질될 소지도 많다. 더구나 국회청문
회 이후로는 섣부른 비리조사식의 선명경쟁이 빈발한다면 담임목사의 명예
는 불이익을 당하게끔 되어 있다.
민주주의는 고도의 책임의식을 수반할 때에만 실효를 거둘 수 있다. 누
구나 발언을 할 수 있고, 너나 없이 한 표를 행사하는 동등권을 보장하고
있지만, 아무렇게나 발언하는 것을 무조건 보장할 수는 없다. 교회의 이름
하에 모이는 각종 회의에서 찬반 양론을 제기할 수 있지만, 언제나 근신하
지 않으면 감정의 대립, 의견의 충돌로 치닫게 되는 것이다.
좀더 큰 모임인 총회의 석상에서나, 노회의 모임에서나 민주주의 제도
에 따른 운용의 문제점은 여전히 남아 있다. 대중 모임에서의 발언은 항상
몇 사람이 도맡아 앞장을 선다. 그러면, 말없는 다수가 공정한 분별력을 잃
지 않아야만 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못하다. 인정과 의리, 동창관계, 나와의
이해관계, 지역적으로 서로 알고지내는 사람을 더 챙겨주고, 그쪽으로 휩쓸
리면 과연 그 결론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가 하면, 목회자들이 민주주의를 역행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소위
강력한 카리스마를 동원하여 교회를 압도하는 목회자의 경우에는 민주적인
절차는 요식행위에 불과하게 된다. 적어도 분기마다 소집하도록 되어 있는
제직회마저도 있으나 마나다.
교인들의 함량미달과 미성숙으로 인해서 중우정치에 빠지거나, 목회자
들의 고집으로 인하여 일인중심으로 얽매인다면, 민주주의의 요람이요, 국
민들의 교과서 노릇을 해야할 교회의 민주주의는 제대로 정착되지 못한 채
표류하게 된다.
그래서, 칼빈은 제네바 교회에다 개혁교회의 조직을 새로이 정비하면서,
당회라는 기관을 최고의 결정기관
이자, 감독기관으로 설치하였다. 다소 귀
족정치의 인상을 풍긴다는 비난을 받곤 하지만, 구약성경에서 각 지파의
대표나 연장자들이 지도그룹을 형성하였고, 신약의 교회에서도 사도들의
모임과 결정에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나갔다면, 소수의 장로들이
결의하여 따르는 것은 매우 성경적인 제도라고 본다.
교회는 민주적인 절차와 방법을 중시하되, 그 헛점과 폐해를 정확히 알
고 각종회의에서 결의하도록 조심해야할 때이다. 교회의 결정이란 함부로
뒤집을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결정된 교단의 총회의 각종 결의도 이런 의미에서 존중되고 지켜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