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특강| 역사적 ‘종교재판’에 대한 개혁주의적 성찰과 평가 _ 안상혁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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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특/강

 

역사적 “종교재판”에 대한 개혁주의적 성찰과 평가

 

<안상혁 교수 _ 합신 역사신학>

 

교회는 오로지 복음적 영적인 치리를 행사해야 하고
물리적 폭력이나 칼의 권세를 행사함은 잘못이다

이단에 대해 교회가 할 일은 바른 신학이 맺는 열매를 통해
정통적 신앙과 교회의 옮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유학시절 학부 교양과목으로 교회사 과목을 수강할 때였다. 그 날의 주제는 중세의 “종교재판” (Inquisition)이었다. “종교재판의 잔혹성을 고발하는 그림 자료들 가운데 대다수는 특정한 시기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스페인의 종교재판 장면입니다.” 교과목을 담당한 교수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신부였다. 가능하면 종교재판과 관련하여 지나치게 과장된 통념을 교정하고 종교재판의 시공간을 되도록 제한시키고자했던 수업으로 기억한다. 신부-교수님의 말은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 흔히 “재정복”으로 알려진 레콩키스타(Reconquista)를 통해 스페인은 이베리아 반도 남부의 이슬람 세력을 축출하고 이베리아 반도를 정치적, 군사적, 그리고 로마 가톨릭 신앙으로 통일시키는 전쟁을 치렀다. 패전한 이슬람교도의 상당수는 강압적인 방식으로 로마 가톨릭 신앙으로 개종할 수밖에 없었다. 스페인에 살면서 강압적으로 로마 가톨릭 교인이 된 무슬림 신자들은 흔히 모리스코스(Moriscos)라고 불린다. 당국의 입장에서 이들은 잠재적 위협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이들은 통제와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일례로 무슬림 신자와 모리스코스는 스페인을 벗어나 라틴 아메리카 식민지로 이주할 수 없도록 만드는 조치들이 취해졌다. 무슬림 신앙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였다. 모리스코스의 개종을 검증하기 위한 수단으로 종교재판이 자주 동원되었다. 그리고 종교재판은 다양한 형태의 고문을 수반하였다.

한편 보다 넓은 시야에서 이 주제를 조망해 본다면, 종교재판을 스페인 역사의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대상을 상대로 벌어졌던 일로 규정하려는 시도는 역사적 종교재판의 일면만을 부각시키는 매우 제한하는 접근이다. 스페인 안에서조차 종교재판은 무슬림과 모리스코스만을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적지 않은 수의 유대인들과 개신교인들이 종교재판에 의해 어려움을 당했다. 종교재판과 관련된 이론적이며 신학적인 주제들도 생각보다 광범하다. 일례로, 정통신앙과 이단, 국가와 교회의 관계 (두 왕국론, 국가교회), 교회의 치리, 개종과 선교, 종교개혁과 반동종교개혁 (로마 가톨릭교회와 개신교), 그리고 제국주의와 식민통치 등의 관련주제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또한 시기적으로도 종교재판에 관한 교회사의 논의는 초대교회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초대교회 시기와 관련하여 부각되는 인물은 뜻밖에도 아우구스티누스이다. 비판자들은 아우구스티누스가 도나투스주의와 싸울 때 공권력의 사용을 허가한 것을 부각시키며 아우구스티누스를 마치 종교재판의 주창자인 것처럼 묘사한다. 반면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아우구스티누스와 중세 종교재판의 연결고리를 최소화시키고자 노력한다. 물론 15-17세기 스페인의 잔인한 종교재판 장면 속에서 아우구스티누스를 찾으려는 것은 잘못된 시도이다. 이단을 색출하기 위해 첩자를 사용하는 것이 정당한지를 묻는 콘센티우스의 질문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를 거절하며 거짓된 수단이 아닌 진실한 논증으로 잘못을 뿌리뽑아야할 것을 역설했다. 제국의 관리들과 지주들이 폭력과 테러를 자행하는 과격한 그룹이었던 키르쿰켈리온스를 처형할 때에도 아우구스티누스는 원칙적으로 사형을 반대했다. 이것이 회개의 기회를 박탈한다는 것이 반대의 주요 이유들 가운데 하나였다. 정리하자면, 아우구스티누스가 중세 스페인에서 이루어진 방식의 종교재판을 주창하지 않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한 후에, 정통 교리를 확립하고 이단을 배척하는 것은 교회의 과업을 넘어 국가적인 과제가 되었다. 국가는 법과 물리적인 권력 행사를 통해 나라의 질서를 유지하고 교회를 보호할 책임이 있었다. 교회는 교회회의를 통해 신학적 입장에서 정통과 이단의 문제를 정리하고, 국가는 이단으로 정죄된 무리를 물리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이 제국 교회 안에 퍼져 있었다. 아우구스티누스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만일 그가 종교재판과 관련을 맺었다면 이러한 주제들과의 관련성 속에서 중요한 신학적이며 이론적인 화두(이를 테면 하나님의 도성과 인간의 도성에 대한 개념)를 제시하고 정리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피터 브라운이 아우구스티누스를 가리켜 아마도 “최초의 종교재판 이론가”였을 것이라고 기술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중세교회 종교재판의 기초를 마련한 대표적인 교황은 그레고리 9세이다. 1231년에 발표된 교황의 칙서는 전문적인 종교재판관을 위한 종교재판의 절차를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종교재판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교황에 의해 선임된 두 명의 지역 재판관이 필요했다. 또한 두 명의 증인(익명성이 보장되었다.)으로부터 제시된 증거가 요구되었다. 심문을 받는 자는 자신의 진술에 대해 맹세하는 형식을 취해야 했다. 대주교와 주교는 자신이 관할하는 지역에 종교재판을 설립하는 책임자 역할을 했고, 주로 탁발 수도회 (특히 도미니코 수도회) 소속의 심문관들이 상기한 지침을 따라 사람들을 심문하고 이단적인 사상을 철회시켜 정통신앙으로 개종시키는 일을 담당하였다. 그레고리 9세 이전에도 종교재판을 제도화하려는 수차례의 시도들이 있었다(1139년, 1179년, 1184년, 1199년). 일례로 교황 루키우스 3세는 황제 프레데릭 바바로사의 도움을 받아 교회에 의한 종교재판을 실시했다. 국가는 교회에 의해 이단이나 불온적인 사상을 유포한 죄로 정죄 받은 자들을 처벌하는 방식으로 교회와 긴밀하게 공조하였다. 12세기에서 종교개혁에 이르기까지 종교재판의 대상이 된 대표적인 이단(로마 가톨릭교회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되었다)은 카타리파와 왈도파였다. 카타리파는 알비 십자군 운동(1209-1229)과 관련이 있고, 왈도파 역시 종교재판과 십자군을 통해 오랜 기간 로마 가톨릭교회의 박해를 받다가, 16세기에 이르러 종교개혁이 확산되자, 상당수는 개신교에 합류하였다.

중세 종교재판의 역사에서 두 가지 주목할 전환점이 있었다. 첫째, 1250년대에 이르러 교황 이노센트 4세는 심문 과정에서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고문 기구를 사용할 것을 허락하였고, 이를 사용한 심문관들은 교회로부터 사면을 받을 수 있었다. 강압적인 방식으로 신앙고백을 받을 때, 이들은 개종자에게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잘못된 사상을 철회할 것을 요구했고 교회법에 따른 참회를 부과하였다. 만일 심문을 받는 자가 끝까지 거부할 경우, 종교재판관은 그를 세속권력에게 넘겼고, 개종을 거부한 이단은 추방, 투옥, 혹은 처형되었다. 사형의 경우 주로 화형에 처하는 방식이 채택되었다. 둘째, 1478년 아라곤의 왕 페르디난드 2세와 카스티야의 이사벨라 1세는 스페인 종교재판소를 건립하였다. 이것은 기존의 종교재판소들과 차별화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곧 교황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왕권에 의해 독자적으로 운영되었다. 물론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직자들과 수도회 소속된 자들이 심문관으로 동원되었다. 스페인뿐만 아니라 스페인의 해외 식민지들에도 설치되었고, 앞서 소개한 대로, 이단뿐만 아니라 무슬림과 모리스코스, 유대인, 개신교 신자들의 상당수가 잔혹한 고문과 폭력적인 강제 개종에 의해 희생당하였다.

종교개혁이 일어나자 종교재판은 반동종교개혁의 수단으로 적극 활용되었다. 1542년 교황 바오로 3세는 교황령을 발표하여 소위 “검사성성(檢邪聖省)”이라는 이름의 종교재판 기구를 설립하고 그것의 활동 범위를 확대해 나갔다. 주로 종교개혁을 억압하고 그것의 확산을 막기 위한 조치들이 기존의 종교재판 기능에 더해졌다. 재판관들에게 로마 가톨릭 신앙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것으로 의심되는 자들을 수색하고 심문하는 권한을 더욱 크게 부여하였다. 로마 교회의 교리와 교황제를 비판하거나, 종교개혁의 사상을 설파하는 모든 출판물을 검열하는 기능도 맡게 되었다. 16세기 중엽 트리엔트 공의회는 금서목록을 작성하였고(제18회기, 1562), 1564년 교황에 의해 발표되었다. 20세기에 들어와 교황 비오 10세는 “검사성성”을 “성무성성(聖務聖部, S.C. Sancti Officii)으로 개칭하였다(1908년). 1965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성무성성“을 ”신앙교리성“ (信仰敎理省, Congregatio pro Doctrina Fidei)으로 바꾸어 이단을 심문하는 기관이라기보다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리를 보존하고 감독하는 기관이라는 의미를 부각시켰다.

중세와 반동종교개혁의 종교재판에 대한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적인 비판은 흔히 “두 왕국론”으로 불리는 유용한 개념을 활용하여 잘 설명될 수 있다. 국가와 교회는 모두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아래에 있으면서 존재의 타당성을 부여받는다. 하나님께서는 국가를 법과 이성을 통해 다스리시고, 교회를 말씀과 성령으로 다스리신다. 국가는 질서 유지를 위해 칼의 권세를 사용할 수 있으나, 교회는 오로지 복음적이며 영적인 치리를 행사한다. 따라서 교회가 물리적인 폭력이나 칼의 권세를 행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16세기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루터파와 개혁파 교회는 국가교회를 성경적으로 정당한 교회의 형태로 인정하였다. 그럼에도 루터와 칼빈 모두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치리가 반드시 영적인 치리이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17세기 뉴잉글랜드 비분리파 회중교회는 이단에 대해 교회가 행사할 수 있는 최고 수위의 조치는 이단과의 교류를 끊어버리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계몽주의 시대를 통과하면서 국가와 교회의 경계는 점점 더 뚜렷해졌다. 국가는 세속 질서를 교란시키지 않는 한 다양한 기독교 종파에 대한 관용정책을 펼쳤고, 교회는 이단을 교리적으로 검증할 수는 있으나 종교재판과 같은 수단을 통해 이단에 대해 강제력을 행사할 수도, 그것을 원하지도 않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오늘날까지 지속된다. 오늘날 한국 사회 안에 수많은 기독교 이단 사상과 집단들이 창궐하지만, 정부는 이들의 신학사상을 검증하지 않는다. 다만 이들이 실정법을 위반할 때에야 비로소 국가권력을 행사하여 위반자들을 물리적으로 처벌한다. 한편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들의 가르침이 성경으로부터 벗어난 비정통적인 신앙이라고 규정하고 각 교단 차원에서 교류를 금지하는 결정하는 수준에 머물 뿐이다. 이러한 정황에서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이단의 오류와 정통신앙의 옮음을 성경과 교리로 증명해 내는 것이 매우 필요하지만 이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바른 신학이 맺는 아름다운 열매를 통해 세상 속에서 정통적 신앙과 교회의 옮음을 증명해야 할 것이다. 주님은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고 말씀하시며 다음과 같이 교훈하신다.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마 7:17-18).

1월부터 필자는 미국 퓨리턴리폼드신학교(PRTS)에서 박사논문을 쓰고 있는 브라질 학생의 인디펜던트 스터디 과목을 지도하고 있다. 학생의 논문 주제는 16-17세기 무슬림에 대한 로마 가톨릭과 개혁교회의 입장에 대한 비교 연구이다. 로마 가톨릭교회 측의 자료가 대부분 포르투갈과 스페인어로 출판된 자료인지라 필자가 오히려 학생의 연구에 귀 기울이는 입장이다. 얼마 전 무슬림에 대한 16-17세기 로마 가톨릭교회와 개혁파 교회의 태도가 별반 다르지 않다는 학생의 중간 연구결과를 받고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 종교재판과 모리스코스에 관련된 주제를 검토해 보았냐고 질문했다. 순간 학생은 당황했다. 신학적인 진술들에 집중하느라 그 부분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고 말하며 스스로 부끄러워하던 모습이 기억난다.

사실 필자의 질문은 이 주제를 다룬 연구물을 읽을 때, 누구나 궁금해할만한 상식적인 수준이었다. 오늘날 연구자들이 중세와 반동종교개혁기의 종교재판과 이와 관련된 주제들을 연구하고 문제 삼는 것은, 어쩌면 에큐메니즘의 분위기를 해치는 비신사적인 행태라고 비난받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종교재판에 관한 역사적 연구는 나름 유익한 요소들이 있고 마땅히 지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중세와 16-17세기 로마 가톨릭교회의 비도덕성을 고발하는 것에 주된 목적이 있다기보다는, 역사적 종교재판을 둘러싼 다양한 연구주제들 가운데 오늘날의 교회도 귀 기울이고 진지하게 배워야 할 주요한 내용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