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3.1운동 100주년의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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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3.1 운동 100주년의 무게

 

3.1운동 100주년이다. 독립선언서 서명자 33인 중 기독인은 16명에 달했다. 또한 당시 1,600만 인구 중 기독인은 1.5%인 20만 명뿐이었지만 3.1운동 피검자 19,528명 중 무려 17.6%가 기독인이었다. 많은 기독인들이 피해를 입고 요시찰 인물이 되었다. 우리는 이런 통계들로 기독교의 3.1운동을 자랑하는데 일면 마땅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황을 면밀히 보면 3.1운동의 교훈은 우리에게 무거운 자각을 준다. 일제가 무단통치를 기초로 전국의 반일 조직을 와해시킨 터라 이렇다 할 구심점이 될 만한 조직이 당시에는 종교계뿐이었다. 이에 천도교 손병희의 요청으로 종교계가 반응했다. 이때 기독교계의 누구는 서명 당일 새벽까지도 목사가 정치적 문제에 개입해야 하는가 고민하다가 결국 참여했다. 독립 청원이냐 독립 선언이냐를 두고도 논쟁이 있었고 더욱이 서명자 33인 중 29인만 선언서 낭독 현장에 참여했는데, 집회 인도, 망명 준비 등 이런저런 이유로 불참한 4인은 기독교 지도자들이었다. 또한 서명 목사들 중 후에 친일로 변절한 자들도 있었다.

따라서 통계로만 기독교의 공헌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한 시대의 기독인이 민족의 현실을 어떻게 바라보고 움직여야 하는지를 교훈 삼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일반 기독인들은 운동 현장에서 선봉에 섰는데 지도층이 민족의 절체절명의 독립 문제를 정치적 사안으로만 생각하며 고민했다는 것은 오늘에도 시사하는 바 크다. 사실 이런 의식 때문에 스코필드나 그리어슨 등 소수를 제외하고는 3.1운동에 적극 참여한 선교사들은 드물었다. 국내 기독교 지도자들의 상당수의 생각도 그랬다.

예컨대 기독교를 통한 서구적 근대화를 갈망했던 윤치호 같은 이는 독립협회와 YMCA를 조직하고 독립운동에 몸 담았었지만 105인 사건을 계기로 친일로 돌아섰다. 그는 일본의 근대화를 본받으려 했고 그런 기저의 가치관에 의해 항일보다는 친일에 섰다. 그는 일본제국의회 귀족원 의원이었고 조선총독부 기관지를 통해 일제를 찬양하기도 했다.

3.1운동 당시 만세 시위를 목격한 윤치호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거리를 메운 학생들과 시민들이 만세를 외치며 종로광장으로 달려가는 모습이 창문을 통해 눈에 들어왔다. 소년들은 모자와 수건을 흔들었다. 이 순진한 젊은이들이 애국심이라는 미명하에 불을 보듯 뻔한 위험 속으로 달려드는 모습을 보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우리는 이 시위와 연루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회관(YMCA) 문을 닫기로 결정했다. 곧바로 군인, 기마경찰, 형사, 헌병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김상태 역, 『윤치호일기』 중에서)

당대 시기상조론, 독립불능론 등으로 중무장했던 윤치호의 이 기록에는 우리의 자화상도 함께 들어 있다. 이는 만세 운동을 방관한 자기반성과 감동이 아니라 우려와 두려움의 기록으로 보인다. 그의 교리적 기독교 신앙과는 별도로 민족의 현실을 끌어안고 나아가는 자세는 아니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친일의 변명은 여러 가지이다. 그러나 당시에 죽음을 불사하고 만세 운동에 뛰어든 유관순 열사를 비롯한 기독인들은 민족의 현실과 신앙의 합일을 보여 주었다. 그들이 있는 한 친일의 변명들은 공허할 뿐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재만주한인교회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3.1운동이 국내에서 수그러들 때 만주에서는 지속되었고 독립운동도 새로운 양상을 보였다. 1920년 봉오동, 청산리 전투의 대패로 일제는 경신참변을 일으켜 만주의 한인들을 박해했다. 특히 교회는 주공격 대상이었다. 교회가 독립운동의 모태였기 때문이다. 1920년 일제의 간도출병으로 재만주한인교회와 기독인들이 당한 참화에 대해 캐나다장로회 스탠리 마틴(민산해)의 보고서는 이렇게 전한다. “일본군은 부대 단위로 국경을 넘어와 한인들을 학살하였는데, 이 수가 200명에 달하고 그 중에서 기독교도가 150여 명이 된다. (……) 기독교도들이 학살의 대상이 되어 생명이 위태롭다.”

사실 초기부터 한국교회의 신자들은 온 민족과 함께 일제강점의 운명을 슬퍼하고 고통을 나누어 오던 터였다(김영재 교수, 한국교회사). 만주교회의 민족에 대한 사랑은 복음과 신앙적 뜨거움이 바탕이 된 그리스도적 사랑이었다. 3.1운동 후 환란기를 거치며 만주교회는 보다 철저한 성경적 신앙으로 성숙되었고 민족공동체적 특성이 형성되었다. 성경공부와 민족에 대한 복음적인 책임감과 사랑이 함께 깊어졌다. 이는 활발한 계몽 운동과 청년 운동, 민족 운동으로까지 이어졌다.(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록, 제11회 회록)

민족 독립 사상을 끌어안고도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순수한 신앙을 가열시킨 만주교회의 모습에서 신앙과 민족적 현실의 합일을 본다. 우리는 나라를 위한 언행과 현재적 활동들이 후세에 어떤 기독교적 가치의 체화에 유익할 것인가를 내다봐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3.1운동 100주년은 우리에게 무거운 책임감을 안긴다. 그 교훈을 기초로 당대의 기독인이며 국민으로서, 신앙과 역사적 현실 속에서의 삶의 합일을 지향하며 이 무게를 감당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