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살해가 급등하는 현실과 ‘죽음공부’(Thanatology)
< 가정호 목사, 세대로교회 >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죽음의 공포를 잊으려고 죽음을 정면으로 응시하거나 사색의 중심에 두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상은 죽음은 현실이다”
한 때 자살의 명예회복을 꾀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자살을 ‘자유죽음’이라고 칭하였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실상 이는 자기 살해를 미화한 것일 뿐이다.
이 땅에서 자살이 모든 세대를 걸쳐 유행처럼 번져가고 있다.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제법 산다는 나라들 중 가히 세계 최고이다. 통계청에 의하면 최근은 하루에 50여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50여 명씩 죽는 것을 365일로 곱하게 되면 가히 다양한 사건이나 사고의 죽음 중 최고의 인재에 속한다.
이는 어떤 이유로든 가릴 수 없는 부끄러움이다. 자살로 감행되는 죽음의 방식은 동서양이 별 차이가 없는 것 같고, 죽음을 다루는 장례의 방식은 나라마다 조금 또는 심한 차이를 보인다.
우리나라에 자가 살해가 이렇게 급격하게 확산되어가는 데는 다양한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이유가 어떻든 이렇게 많은 이웃이 죽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가 그늘속의 그림자처럼 숨겨져 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모든 영역의 전문가들이 속히 대안을 찾아서 이 불행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자살확산을 수치스럽다고 생각하여 발설하기를 부끄러워하는 것으로는 상황을 더욱 심각하게 만들뿐 전혀 대안이 될 수 없다. 이 자살행렬을 끊고 삶의 희망을 제시하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생각이 짧은 예단이며 어리석은 일이다. 하나님께 구하고 모여서 지혜를 찾아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교회 밖을 돌아보면 최근 10여 년간 죽음을 막아보겠다는 관심이 서서히 일기 시작하여 최근에 이르러서는 조금씩 활발해 지고 있다.
필자가 처음 죽음에 관해 접할 수 있었던 책은 물론 성경이다. 성경에서 죽음을 어떻게 다루는지를 살펴보는 일이 중요하다. 그 다음은 고전인 제레미 테일러의 “거룩한 죽음”이었다. 그 다음에 접한 책은 엘리자베스 퀴블로 로스의 “인간의 죽음”이었다. 그것이 거의 볼륨 있는 전문서로는 유일했다. 얼마 후에 알폰스데켄이 죽음에 관한 정보를 나누어 주었다. 그 이후부터는 산발적으로 다양한 정보들을 볼 수 있었다.
목회에서는 임종목회, 또는 장례예배를 통하여 죽음을 접하고 다룬다. 그동안 죽음을 학문으로 다루는 접근은 소수의 사람들에게서 진행되어 왔었고, 실제로 큰 진전이 없었다. 자료도 거의 없어서 글을 써도 결국 반복되는 이야기를 벗어나기가 어려웠었다. 시중에 나온 죽음학에 관한 책은 거의 거기서 거기이다.
천주교에서 죽음을 다루는 태도가 많이 연구 되어진 것은 사실이다. 알폰스데켄 신부는 동지사대에서 죽음을 가르치는 전문가로 오랫동안 일해 왔다. 그의 책들은 몇 권 나와 있다. 한국에도 몇 번 와서 세미나를 진행했다. 그의 책에는 세계 유수한 나라들이 죽음을 어떻게 가르치는지, 죽음학 교육과정들이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이러한 논의는 서울 신문로에 있는 ‘각당 복지재단’에서 주로 진행했다. 각당 복지재단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전통이 있고 권위가 있는 ‘죽음학’ 연구기관에 속한다. 연세대에서 공부하였고, 세계감리교 여성회 회장을 지냈던 김옥라 선생이 남편 나익진과 함께 자신들의 재산을 들여서 세운 기관이다. 이후에 김옥라 장로와 뜻을 같이 한 여러 선생들의 특별한 헌신으로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는 귀한 기관이다.
세계 도서전에 등장하는 죽음에 관한 전문서적은 몇 권쯤 될까? 확인한바 아니기에 정확하게 기술은 못하겠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출판된 죽음에 관한 이론이나 학문 또는 실용서는 모두 합해도 500권을 넘지 않는다. 이는 삶의 이면에 언제나 따라다니는 죽음이라는 현실을 직시하려는 열정이 그만큼 숨겨져 있음을 보여주는 실상이다.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죽음의 공포를 잊으려고 죽음을 정면으로 응시하거나 사색의 중심에 두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상은 죽음은 현실이다. 죽음은 언제나 우리들 곁에 있다. 시내에 장례식장은 언제나 죽음으로 붐빈다. 화장장을 방문해보면 문을 연 시간부터 문 닫는 시간까지 거의 매순간 주검이 태워진다. 거기엔 눈물이 있고 통곡이 있다.
죽음이 특별하게 다루어지던 과거에 비하면 지금은 거의 무시되어지는 듯하다. 금방 잊혀진다. 비참했던 대구의 지하철 참사도 잊혀졌다. 씨랜드에서 비명횡사한 유치원 어린이들의 죽음도 그렇다. 부산 외국어대의 경주 MT사건도 잊혀지고, 세월호에서 죽은 안산 단원고의 금쪽같은 아이들의 엉터리 죽음도 금방 잊으려든다. 더더군다나 마을 어귀 어느 아파트의 옥상에서 떨어져 죽어간 무명의 소녀에 관한 죽음이야기는 TV에 30초도 등장하지 않는다.
최근에 우리 개신교계에도 죽음을 다루는 열심이 조금씩 구체화 되고 있어서 기쁘다. 기윤실에서 주로 죽음을 실천적으로 또는 봉사학으로 다루려고 애쓴다. 실천신학대학원의 조성돈 교수에 의하여 진행되는 생명보듬기 운동, 자살예방 교육사 훈련이 전국적으로 펼쳐지고 있다. 죽음학회도 조직된다는 소식이다. 각 대학마다 ‘죽음학’ 강의가 신설되고 있어서 이 또한 기쁘다.
필자는 최근 SNS인 페이스 북에 “자살&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모임”을 열었다. 어떤 날은 하루에 20-30명의 청소년들이 가입하여 죽음을 이야기 한다. 주로 자살 이야기이다. 어떻게 하면 쉽게 죽는지 고민한다. 어떤 이는 같이 죽자고 덤빈다. 몇 달 만에 800여 명을 넘어섰다. 감사한 일은 서로가 돕는다. 죽음을 논한다. 실상은 죽음학이 가장 현실적으로 격렬하게 다루어지는 곳이 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죽음을 시도했던 사람들 중에 죽지 못하고 살아난 사람들이 더러 있다. 이분들 중에 뭔가 죽음에 대한 사색을 많이 하신 분들이 더 열심히 이웃을 돕는다는 사실이다. 역지사지를 알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그 고통을 이미 맛보았기에 더 몸부림 칠 것이다. 그래서인지 “죽지마라!”는 이 한마디에 무게가 다르게 다가온다.
치유 받은 상처를 가진 분들이 이웃을 위해 더 울듯이 그런 현상이 여기에서도 동일하다. 참으로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