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편지
칼
<박부민 국장 nasaret21@hanmail.net>
칼은 이중성의 상징이다. 그 용도에 따라 생명과 죽음을 가른다. 그래서 칼의 본성은 서늘하다. 칼은 정당한 권력과 법 집행에도 사용되지만 억울한 단죄의 오류를 낳고 베고 베이는 자가 얽혀 숱한 원한의 악순환을 빚기도 한다.
전시(戰時)가 아닌데 공공연히 칼을 들고 다니는 자들을 칼잡이라 했다. 칼을 지님은 두려움의 다른 표현이다. 난세에 호신의 필요악으로 수용되거나 서로에게 적이 많았다는 증거다. 칼 하나 둘러메는 것이 기본 품새였던 시대엔 여차하면 칼부림이 다반사였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애먼 희생이 있었겠나. 정의롭지 않은 사사로운 감정이 치올라 마구 휘두르는 칼은 사회 불안의 원인자였다. 제어되지 못한 분노로 빼드는 칼을 낭만이 스민 마초적인 멋쯤으로 여기는 건 영화의 한 장면일 뿐 실제로는 비극의 단면이다.
그러나 칼의 사용을 최대한 자제하고 정의로운 평화를 위해 힘쓰며 사람들에게 존경 받는 자를 무림의 고수라 한다. 나아가 두려움이 없는 진정한 고수는 칼을 집에 보관하고 맨몸으로 다니며 꼭 결정적으로 필요할 때만 꺼내어 사용한다. 칼이 좋은 인격과 결부되면 쓰지 않아도 보검이지만 그 반대라면 한낱 무서운 핏빛 살상 도구일 뿐이다. 칼의 궁극적 자기 존재 증명은 피가 아니라 평화이다.
국가도 개인도 오래 응축된 분노의 앙갚음에 쓸 속셈으로 칼을 갈며 기회를 엿보는 경우가 많다. 우리 내부에는 그런 칼이 없는가? 이문열의 소설 ‘그해 겨울’에는 자신을 옥살이로 내몬 자들에 대한 증오와 적의로 복수를 벼르며 칼을 품은 사내가 나온다. 그런데 그는 말미에 칼을 바다에 던져 버리고는 “내 오랜 망집을 버렸다.”면서 비로소 칼에서 놓여난다. 누군가를 겨누는 칼의 망집이 우리에겐 없는가?
제딴은 의분으로 칼을 휘두른 베드로에게 주님은 “칼을 쓰면 칼로 망한다.”고 하셨다. 고수라면 무고한 희생자가 나올까 늘 주의해야 한다. 누군가 실수나 오류에 빠질 때 전후좌우를 살피지도 않고 보란 듯이 칼을 빼서 달려드는 야만이 우리 속에도 있다. 더 슬픈 일은 벤 곳을 또 베는 잔인함으로 배려도 이해도 사랑도 함께 난도질함이다. 이 칼부림의 시대에 틈만 나면 비난과 단죄의 칼을 갈며 응징을 벼르지 말고 되레 사랑의 마음과 영혼의 분별력을 예리하게 벼리며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