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학술 행사에 대하여
올해는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행사들이 봇물을 이루어 왔다. 그중에 학술대회는 우리를 설레게 한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또 좋은 생각을 공유하는 연합의 장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우리 교단에서도 신학의 현장화, 신학교의 대중화의 일환으로 합신의 교수들이 방문 혹은 초청 형식으로 노회를 찾아가 신학적 주제들을 나누며 목회에 성찰을 제공하는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어 더욱 고무적이다. 여러 노회들 혹은 시찰회의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행사에서 교수들을 초청하였다는 소식은 반갑기 그지없다. 다양한 과목의 더 많은 교수들에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지속적이고 의미 깊은 활동이 될 것이다. 이는 노회 차원만이 아니라 각 교회에서도 성도들을 위해 주최가 가능한 일이고 이웃 교회들이 참여하여 성황을 이루면 더욱 풍성하고 실효적인 행사가 되리라 믿는다.
혹자는 교수들의 강의가 목회나 신앙에 무슨 큰 도움이 되느냐고 하지만 바쁜 중에도 평생 동안 공부해야 하는 목회자들에게 신학생 시절의 순수함과 진리에 대한 열정의 회복, 그리고 최근 신학의 흐름을 감지하고 우리의 정체성을 통찰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은 참으로 귀하고 고마운 일이다. 바라기는 이런 학술 행사들과 더불어 목회자 자신들이 공부하며 기도하는 모임들도 활성화되었으면 한다. 그래서 서로 좋은 논제들을 준비하고 발표하는 자리에 교수들을 초청하여 자문하며 우리들의 정체성을 정돈하는 시간을 갖는다면 금상첨화라 본다.
최근의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학술 행사의 정점은 제29회 정암신학강좌와 이어진 합신신학강좌였다. 정암신학강좌의 ‘종교개혁의 신학과 오늘’이라는 주제는 아주 적실하였다. 모든 신학함은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로 귀결될 때 의미가 배가된다. 어떤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는 방식에는 그 역사 자체를 정확히 공부하며 기억하는 것과 그 교훈과 정신을 오늘에 되살려 구체적 현실에 적용하며 실천하는 것까지를 포함한다. 오늘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부단히 천착하고 그에 따라 실천적 적용점들이 나오도록 힘쓰는 것은 지당하며 숭고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 종교개혁의 신학을 오늘 우리의 역사로 연결하여 함께 연구하고 고민하며 실천을 지향하는 것은 좋은 기념 방식이라 하겠다.
이번 정암 신학강좌와 합신신학강좌의 내용들이 더욱 와 닿는 것은 갈수록 성경과 구원의 도리 그리고 건전한 교회론에 대한 의식이 공격을 받고 희석되어 가는 시대적 아픔을 반영한 때문이다. 학술 논문들이 학자들만의 영역에서 운용되지 않고 시대의 첨예한 문제들을 반영하며 대중적으로 연구되고 발표되는 것은 이후로도 바람직한 일이다.
참석한 어느 교수의 평가처럼 많은 사람들이 이번 정암신학강좌가 예년에 비해 일층 발전된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그것은 일방적이지 않고 함께 소통하려는 의지를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성만찬 논쟁과 종교개혁자들의 분열의 장으로 알려진 마르부르크 회담을 신학생들이 극으로 표현한 것은 비교적 참신한 기획이었다. 이런 시도는 신학생들에게도 청중에게도 유익하다고 본다. 마르부르크 회담은 격렬한 논쟁의 장이었지만 당시 그들이 얼마나 진지하게 성경적으로 고민하며 바른 길을 가려고 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분열을 막으려 서로가 애썼는지를 극을 통해 공감하게 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다만, 시간 때문에 해당 발제에 대한 논평이 생략되어 아쉬움은 남는다. 전통적으로 논문대회는 발제에 따른 논평이 있어야 청중들에게 다양한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다음에는 개회 시간을 조금 앞당기더라도 가급적 교류 교단 교수들이나 외부 학자들로 구성된 논자들을 선정하여 촌평이라도 듣도록 했으면 한다.
논문 발표 이후에 진행된 좌담회는 시간이 부족하다 느낄 정도로 알찬 내용이었다. 실제적 문제들을 함께 고민하고 나눈다는 점에서 소통의 극치라 할 수 있다. 패널에 은퇴 교수들도 함께 했다면 연륜에서 나오는 더 지혜로운 답변들도 있었으리라 본다. 이후엔 좌담회의 질의응답 시간이 잘 확보되고 청중도 많이 참여하도록 탄탄하게 구성되기를 바란다.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가시적이고 확실한 방법 중의 하나가 규모 있는 행사임에는 분명하다. 그중에 학술대회는 그 효과가 적지 않다. 이는 언표를 통해 현장에서 각성을 줄 뿐 아니라 2차적 문서 작업을 통해서도 부대효과를 보기 때문이다. 교단적으로, 또 노회나 개교회에서도 학술 행사를 개최하고 성찰의 기회를 만드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모든 행사 뒤에는 허탈함도 다가온다는 점이다. 행사를 통해 얻은 각성과 교훈 그리고 적용점들을 삶의 현장에서 지속적으로 실천할 때만이 그 허탈함을 넘어선 참된 의미와 보람을 찾게 될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