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회 총회와 총대들을 위하여
비록 총회가 임시적 모임이라 해도 그 중요성과 상징성은 크다. 그래서 그 중요성에 대한 강박이 교권주의와 결탁하면 문제의 온상으로 변질되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 교단의 총회는 나름대로 자정 능력과 자기 절제의 면모를 갖추었다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객관적으로 보면 우리에게도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소소한 부분들이 눈덩이가 되어 우리를 허물 수 있는 큰 파괴력을 갖기 전에 매회 시의적절하게 진솔한 논의와 적법한 결정 과정을 통해 더디더라도 반드시 난관을 극복해 나아가야 한다.
먼저, 반복되는 갈등의 해결을 도모해야 한다. 잠복해 있다가 총회 때마다 나타나는 사안들이 있다. 특히 신학적인 토대와 교단의 정체성에 얽힌 문제의 경우엔 임시적 봉합으로 되지 않는다. 이에 대한 정당한 헌의안으로 상정된 사안들에 대해 총회가 적실한 답변을 내놓지 못하고 자꾸만 다음 회기로 넘기는 습관에 길들여지는 것은 바람직스럽지 않다. 어찌하든지 결론 도출을 위한 총대들의 엄정하고 양심적인 논의의 자유가 주어져야 한다. 총회는 그것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좋은 게 좋은 것이고 덕을 세우기 위해 그냥 넘어가자 하거나 툭하면 몇 년의 유예로 잠정하는 태도는 불가피할지는 몰라도 자랑할 만한 모습은 아니다.
어떤 사안이든 논쟁과 잡음이 예상된다고 해서 적당히 물러서거나 양심적으로 수용할 수 없는 타협안으로 우리 스스로를 속여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가 맞닥뜨리게 될 두려움의 실체가 무엇인지 분명히 파악하고 회피하지 말아야 한다. 다수가 옳을 수도 있고 때론 소수가 옳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의결의 과정은 자유롭고 양심적이어야 하며 어떠한 형태의 압력도 존재해서는 안 된다. 개혁주의 총회는 세력 다툼이나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장이 아니다. 성경적 논의의 자유가 충분히 주어지지 않는다면 전국의 총대들이 왜 소중한 시간을 내어 모이는가.
따라서 총대들은 각 노회에서 회원들의 열망과 기대와 전폭적인 신뢰 속에서 적법하게 선출하여 파송한 대표자들임을 명심해야 한다. 이 상투적인 말을 왜 꺼내겠는가. 총대들이 자신들의 권리와 의무에 해태하며 총회의 자리만 메우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하물며 총대로 선출되고도 총회에 참석하지 않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부끄러운 일이며 중도에 빠져나가는 것도 비천한 일이다. ‘부득이’라는 단서를 달아 대(代)를 세운다 해도 오랫동안 고개 숙여야 할 일이다. 주일성수를 중시하듯 총대들의 총회 참석은 중차대한 일로 인식되어야 한다.
이렇게 귀하게 참석한 총대들의 기본권은 자유롭게 보장되어야 한다. 교단의 원로이든 선후배의 질서든, 큰 교회를 섬기든 그렇지 않든 적어도 총회의 결의 과정에는 어떤 종류의 부적절한 압력도 개입해서는 안 될 것이다. 총대들 각각 성경적인 원리와 기초 위에서 판단한 대로 의견을 개진하며 법적 결의 과정에 양심적으로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총회의 의결에서의 의견 개진은 설득의 과정이다. 그러므로 총대들은 자신의 의견을 활발하게 발표해야 하고 또한 윤리적, 인격적 성숙함을 견지하는 것이 자신과 모두에게 유익하다. 언성을 높이거나 경박한 태도를 취한다면 그만큼 설득력과 신뢰성의 낙폭이 클 것이다. 따라서 어떤 사안에 대한 논의를 위해서는 사전에 많은 공부를 하고 오는 것이 좋다. 평소에 아무 견해도 가다듬지 못한 채 현장에서 즉흥적, 감정적으로 의견을 말하다보니 인격적인 실수와 더불어 설득력이 약해지고 공감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총회에서 무엇인가 주장하고 싶은 것이 있거든 전회의 자료들을 섭렵하고 관련 자료들을 철저히 연구해서 설득력을 갖춰 참여하기를 권한다. 그것이 논의 시간의 절약과 총회의 질적 고양에 일조하는 자세이다.
우리 총회도 늘 깨어 있지 않으면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개혁주의적 기초 위에서 작은 허점이라도 보완하고 더욱 건전하고 성경적인 총회로 나아가야 함을 모두가 깊이 인식하도록 하자. 임원, 상비부를 포함한 모든 총대들이 반드시 참석하여 성실하게 의무를 다하고 자유롭고 양심적으로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며 잘 준비된 논의를 통해 결실을 맺는 102회 총회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