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잡한 상황 속에서의 그리스도인
오늘 우리들은 매우 복잡한 상황 가운데 있다고 느낀다. 그런데 한국 현대사의 어느 시점에 복잡하지 않은 때가 있었을까? 사실 성경에 의하면, 타락 이후 인간은 죄를 범함으로 만들어 낸 복잡함 중에 살아간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본적으로 다음 세 가지가 어우러진 태도를 가져야만 모든 것을 제대로 파악하고 바르게 생각하며 사는 것이 된다.
첫째는 이 복잡한 상황이 비정상적(abnormal)임을 인정해야 한다. 즉, 현재의 세상이 비정상적이고 우리들이 모두 비정상이라는 것이다. 물론 성경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려고 하지 않는다. 또 조금 인정하더라도 그리 심각하지는 않다고 보려 한다.
둘째는, 이 복잡함과 비정상성이 우리가 집단적, 개인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며 그 궁극적 해결책이 우리에게 있지 않을 만큼 그 상황이 심각함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 자신이 문제의 근원임을 생각한 사람들 중의 일부는 스스로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길을 찾으려고 한다. 혹자는 솔직히 우리에겐 희망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그런 상황에서나마 무언가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것이 인간의 실상이라고 한다.
20세기 초반의 소위 무신론적 실존주의자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인간의 삶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솔직히 인정하면서도, 그러니 의미를 찾고 추구하고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우리의 본질은 결정되어 있지 않고 이 실존이 선행적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사르트르의 그 유명한 “실존이 본질을 우선한다”는 말의 배경이다. 여기엔 부단한 인간의 추구만이 나타날 뿐이다. 타락한 인간은 그 이상을 알 수도 없고 할 수도 없다.
셋째로, 그러니 우리 문제의 근원적 해결책은 우리의 손에 있지 않다. 그것은 오직 자유롭게 우리에게 해결책을 주시는 하나님의 손에만 달려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속과 그것이 인간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고 진정한 승리임을 드러낸 그리스도의 부활만이 우리의 문제의 해결의 열쇠라고 선언하신다. 이것을 믿는 곳에 기독교 신앙이 있다.
우리는 모든 복잡한 상황에 이 세 가지를 다 적용하여 생각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기독교적 사유”이다. 구원의 문제에는 이 셋을 연관하여 생각하면서도 다른 문제들에는 그렇지 않으려는 건 온전히 기독교적이지 않다. 우리 사회의 모든 복잡한 문제에 직면해서도 근본적으로 이 세 가지가 연합된 태도로 참된 기독교적 사유를 해야 하고 그로부터 참된 기독교적 실천이 가능하게 된다.
성령님께 의존하려고 애를 쓰고 노력해서라도 우리가 이런 기독교적 사유를 한다면 세상의 복잡한 문제 앞에서 전혀 기죽지 않고 그 모든 문제들을 정복하신 그리스도의 승리의 빛에서 그 문제를 직시하게 된다. 따라서 참으로 기독교적 사유를 하는 우리에게는 모든 문제의 복잡성과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전혀 문제가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에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의 여유와 유연함과 관대함이 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이 모든 문제를 그저 외면하는 것은 아니다. 주께서 종국적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고 귀정(歸正)하시기 전에 과연 상대적으로 나은 것이 뭔지를 생각하며 그것을 위해 노력하는 일을 누구보다 열심히 해야 한다. 가장 선에 근접하며, 악에 덜 가까운 길을 찾고, 또한 그 문제를 가장 효과적으로 해결할 방도를 찾으며, 그것을 위해 힘을 쓴다. 여기에 순례자로서의 우리의 노력의 의미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행하는 그것에도 전혀 집착하지 않는 자세여야 한다.
이것이 기독교적인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행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위하는 동기로,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려는 열심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우리의 그 행하는 바와 그 산물을 우리는 절대화하지 않는 것이다. 누구보다 열심히 하나님의 뜻에 가까운 것의 실천을 위해 힘쓰면서도, 우리가 행하는 것이 전혀 공로가 아니라는 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의 태도이다.
사실 초기 루터는 자신이 애쓰는 것이 자신을 전혀 의인으로 만들지 못하며 여전히 자신을 죄인이라고 선언하게 한다고 느꼈다. 그러니 어떻게 우리가 애써 행하는 바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의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저 우리는 상대적 의를 행해 가려고 하는 것이며, 따라서 늘 부족함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우리의 애씀을 의미 있게 보시며 성도들의 그런 노력을 통해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진전시켜 나가신다. 그러나 그것 역시 주님의 일이고 우리는 무익한 종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해 나가는 것뿐이다. 우리 모두가 진정 그런 하나님의 종들의 역할을 할 수 있었으면 한다.
이런 논의에 비추어 보면, 우리는 너무 비기독교적으로 사유하는 경우가 많고, 전혀 주님의 뜻을 향해 나가지 않는 경우가 많으며, 또 열심이 있다는 사람들은 너무 자기 확신, 자기 신뢰, 자기 사랑에 넘쳐 있다. 이 모두가 회개할 일이다. 종교 개혁 500주년을 기념하고 있는 해에 우리 자신을 깊이 생각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