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 총회 교직자 수양회 강설 >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로 강하여라
< 서문강 목사, 중심교회 >
1. 은혜의 원천 (요4:13,14; 롬3:20-26)
먼저 이번 성회를 위하여 은혜 주실 하나님을 찬미한다. 이런 특별성회에 참여한 강사나 회중이 빠질 수 있는 유혹은, ‘이제까지 듣고 배우고 알아왔던 것과는 별다른 무엇을 주고 받아야한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그런 태도는 성경에서 사도들이 보여준 것과는 다른 인간적인 함정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내에 ‘부활이 없다’는 교훈을 가지고 악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어떻게 대처하였는가?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I want to remind you of the gospel I preached to you?-NIV),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고전 15:1,2).
사도는 고린도교회 지체들에게 다른 것을 요구하지 않고 이미 들었던 복음을 다시 상기하게 하고 그 안에서 더욱 견고하게 서게 하는 방식을 채용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현대에 맞는 현대적인 복음’ 같은 것은 없다. 항상 사도가 전했던 바로 ‘그 복음’이다. 그리고 세대의 차이도 복음 앞에서는 의미가 없다. 하나님은 불변하시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곤경도 같고, 그 곤경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방식도 변화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13:8).
이번 수련회를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방식에 집중할 때’ 우리 심령을 소성케 하시어 견고하게 서게 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바라자.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딤후2:1).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두 줄기’가 서로 꼬여 이어 달려가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두 줄기’ 중 한 줄기는 ‘인간의 죄악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줄기요, 다른 한 줄기는 ‘그 곤경에서 당신의 백성들을 사랑으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줄기’이다.
요한복음 4장에 등장하는 수가성 여인과 예수님의 만남은 바로 그 ‘두 줄기’ 정점(頂点)의 조우(遭遇)와 같다 할 수 있다.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같이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닌’ 그 여인의 상태는 ‘죄가 가져온 인간의 비참’을 포괄적으로 보여주는 형국이다.
그래서 그녀는 ‘곧 다시 목마르게 하는 물을 들이켜나 결국 허무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그렇게 살다가 결국 하나님의 진노가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의 파멸에 던져질 인생의 곤경을 보여주는 모델과 같다. 그러나 그녀에게 자신을 드러내신 예수님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약속하시고,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내신다.
그 여인은 이제 ‘자기 속에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지닌 새 사람이 되어 ‘물동이를 버려두고 자기가 사는 사마리아 동네로 들어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선다. 그녀를 통하여 그 동네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는다. 그러면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과 같은 은혜의 원천’은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의 도와 그 구속(救贖)의 완성’이 그 ‘은혜의 원천’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그 ‘은혜의 원천’을 사모하고 거기서 나는 것으로만 마시길 원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를 우리에게 베푸신 복음의 절대적인 진수는 ‘이신칭의(以信稱義)’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3,24). ‘의롭다 하심’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하늘 법정에서 믿는 이를 향하여 ‘네가 죄를 한 번도 지은 적이 없고 율법의 모든 요구를 완전하게 이룬 것으로 여기노라’는 판결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백성들의 죄를 전가 받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다시 사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것을 믿음을 통하여 당신의 백성들인 우리에게 전가하심으로 죄용서 하시고 의롭다 하신다. 그것이 복음의 진수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제출할 ‘의’를 그리스도로 이루게 하시어 그것을 우리의 것으로 여기시어 죄책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행사는 ‘단회적으로 완성되고 그 효력은 영원하다.’ 그 효력을 무효화시킬 것은 없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3,34). 성화(聖化)는 칭의의 부족분을 채우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성화는 칭의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고 “흑암의 권세에서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져”(골1:12)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로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려는(롬 8:29)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거룩한 헌신으로 죄를 이겨 가는 반복적인 과정이다. 성화의 과정 중에 ‘우리의 연약으로 인하여 넘어져도’ 칭의의 효력은 없어지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붙잡아 일으키시며 연단하시고 징계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다루심이 그에게 있다.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시37:24). 오늘날 ‘성화의 열매로서의 행위’를 구원의 조건인 같이 말하는 신학자들은 복음의 은혜의 진수를 파괴하는 자들이다. 성화의 열매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칭의’로 말미암아 그 속에 영생의 새 생명을 가진 자들이 보이는 은혜의 열매다.
야고보서를 들어 로마서의 복음의 논리를 전복시키는 일을 사탄 말고 누가 좋아할 일인가? 로마서의 복음으로 야고보서의 ‘행함 있는 믿음’을 해석해야 한다. ‘로마서의 복음의 은혜에다 야고보서의 행함을 더해야 비로소 천국에 들어간다’는 식으로 말하면, 야고보서를 잘못 읽은 것이다. 야고보서는 의롭다 하심을 받기 이전의 사람들에게 주신 서신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빙자하여 방종하고 육체의 기회로 삼으려는 성향을 보이는 사람들에게 경계하며 은혜에 합당한 실천을 강조하는 것이 야고보서의 핵심 메시지이다.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약1:25).
우리는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은 종교개혁의 중심을 관통하는 ‘이신칭의’ 교리의 논리와 그 능력과 영광 안에서 더욱 견고하게 서자.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강하게 되는 첩경”이다.
▲ 여전도회 특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