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신앙>
그리스도인의 자존심과 품위
< 김인석 목사, 칼빈장로교회 >
“진리 위해 고난과 불이익 감수하며 영원히 주님 위해 살고자 하는 자세 가져야”
잘 알듯이 욥기 6장은 친구들을 향한 욥의 첫 번째 변론이다. 22절에서 욥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언제 너희에게 나를 공급하라 하더냐 언제 나를 위하여 너희 재물로 예물을 달라더냐”
이때의 욥은 누가 보더라도 가장 가련한 자였다. 그는 가진 재물과 자녀들을 잃었고 아내마저 떠났으며 게다가 육체의 질병까지 덮쳐 그에게 남은 소망이란 죽음뿐인 듯했다. 방문자들은 위로는커녕 욥에게 책망과 충고의 말을 던졌다. 그러나 욥은 방문자들의 충고에 동의할 수 없었다. 아니 자신과 그들의 인식 사이에는 현저한 차이가 있다고 생각했다. 욥은 방문자들에게 말하기를 자신은 목숨을 구걸한 적이 없었으며 동정과 궁핍함에 목말라 하는 사람처럼 굴지 않았다고 단호히 말했다.
욥이 방문자들의 도움을 거절한 이유가 무엇일까? 욥은 동방에서 유력한 사람이었다. 재물과 명예와 권위로 존경받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욥은 가장 비참하고 가련한 처지가 되었다. 욥의 거절은 마지막 남은 자존심일까, 아니면 자격지심일까?
방문자들은 비참한 욥을 동정하였다. 그들이 처음 욥을 발견했을 때 욥은 겉옷을 찢고 티끌을 날려 머리에 뿌리며 칠일 동안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들의 의는 욥의 허물을 발견했고 책망했다. 그들의 선은 욥의 결핍을 채워주려고 했다. 그러나 욥은 첫 번째 것은 부인했고 두 번째 것은 거절했다.
욥의 부인과 거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자존심과 품위’에 대해 생각해 본다. 욥의 고난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방문자들은 범죄의 결과라고 생각했다. 욥은 자신이 그와 같은 환난에 처할만한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믿고 있었다.
방문자들은 과거에 큰 영화를 누리던 경건한 자가 은밀한 죄로 꺾여 비참한 처지가 됐다고 생각했다. 그들에게 욥은 이웃의 도움으로 연명해야 하는 비루한 사람에 불과했다. 심지어 그들은 자신의 충고를 따라 죄를 고백하고 여호와께 용서를 빈다면 더 좋은 일들이 있을 것이라고 설득하기까지 한다.
욥은 자신을 돌아보거나 선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아도 방문자들의 책망에 수긍할 수 없었다. 또한 그는 일정한 음식과 재물의 충족만으로 위로를 얻는 자로 평가받기를 거부했다. 설령 삶이 더 비루하게 될지라도 그는 근거 없는 비난 때문에 더 높고 큰 가치와 목적을 버릴 수 없었다. 이생의 평가와 만족에 기대어 적당히 타협하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으로써 정당한 자존심과 품위를 지키려고 한 것이다.
이러한 자존심과 품위란 무엇일까? 초대교회 성도들은 모진 핍박과 고난의 현장에 끌려나왔을 때 마음으로도 입술로도 주님을 부인하지 않았기에 그 대가로 순교의 길을 갔다. 그리스도인, 곧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고귀한 이름의 자존심을 지킨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품위였다. 비근하게 일제강점기 한국교회사를 돌아보자. 부당한 일제의 신사 참배 요구가 어떤 이들에게는 그럴듯한 변명에 기대어 타협하기 쉬운 종류의 일이었다.
그러나 또 다른 이들에게는 도저히 마음이나 행위로 단 한 순간도 동의할 수 없는 문제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존심을 지키며 죽음의 길을 택했다. 그렇게 하여 지상에서 가장 고귀한 품위를 보여 주었다. 우리는 그들을 순교자라고 부른다. 역사의 종국까지 대대로, 그리고 영원히 그들은 거룩한 자존심과 품위를 지킨 자들로 기억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자존심과 품위란 모든 조건이 넉넉히 갖춰지고 아무런 부족함이 없는 데서 발휘되는 것이 아니다. 또한 가난하고 비루한 처지에서 즉흥적으로 발휘되는 것도 아니다. 이런 저런 삶의 정황이란 겉옷에 불과하다.
그리스도인의 자존심과 품위는 하나님의 진리를 위해, 또 그 진리가 요구하는 삶을 위해 기꺼이 불편과 부당한 대우와 배고픔과 배척과 죽음을 당할지라도 억울해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영원히 주님을 향해 살고자 하는 자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