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의 목사상(牧師像): 장수(將帥) 혹은 성주(城主)
< 김무곤 목사, 대구동흥교회 >
“목사는 마을 혹은 도시의 영적인 안전 책임져야 할 위치에 있어”
목사는 그 누구보다 분명한 정체성을 확립해야 한다. 목사의 사명이 무엇인지, 나는 왜 지금 이 시기에 목사로 부름 받아서 지금의 이 교회에서 지금의 이 성도들을 섬기고 있는지를 알고 사역하는 목사야말로 건강하고 충성스럽게 사역할 것이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부르시면서 그가 붙들어야 할 정체성의 핵심들을 정확히 알려주셨다(렘1:9-10). 정체성이 분명하면 짐이 무거워도 잘 감당해 나간다. 그렇지 못하면 목사라도 흔들릴 수밖에 없고, 결국 맡겨주신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없다.
목사안수를 받은 지 16년이 넘어가고 있다. 소명을 받아서 목회자의 길로 들어서고 교육전도사, 전임전도사, 강도사, 부목사 기간을 거쳐서 지역교회의 청빙을 받아서 지금의 교회를 담임하고 있다. 목사후보생 시절부터 기준으로 하면 30년이 다 되어간다.
부르심을 받았던 그 시절을 생각하면 순수하고 이상이 높았으며 뜨거웠지만 목사상(牧師像)에 대한 굳건한 정립은 되어 있지 않았다. 막연히, 이런 목사가 되어야 하겠다거나 나는 결코 저런 목사가 되지 말아야 하겠다고 하는 정도의 막연한 이미지만 지니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목사의 정체성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절감한다.
목사는 설교자요 목양자라고 하는 것이 목사의 정체성에 대한 고전적 대답이다. 담임목회로 들어선 초기 몇 년까지 나의 목사로서의 정체성은 주로 설교자로서의 목사였다.
설교자라는 정의 속에는 말씀을 선포하는 자(하나님의 대언자)와 말씀을 가르치는 자(교사)의 정체성이 주를 이루었다. 말씀을 잘 연구하고 준비하여 그 말씀을 잘 전달하고 선포하고 가르치는 것이야말로 목사의 가장 핵심적인 사역이라고 여겼다.
지금도 그러한 생각에는 변함이 없으나 돌아보면 균형을 잃었었다. 목자로서의 개념은 한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내게 목자의 심령, 목양의 심령이 부족함을 알게 되면서 많이 힘들었다. 그러나 지금의 생각은 좀 다르다. 그것은 마치 이런 것과 같다.
청년이 결혼을 하여 처음 아이를 낳아서 아버지가 되었다. 그런데 그는 아버지로서의 준비는 아직 잘 안되어 있는 것이다. 태어난 아이가 자라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고 생활하면서 점점 진짜 아버지가 되어간다. 아버지 어머니보다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훨씬 더 손주들을 잘 돌보는 이유는 이미 큰 실패를 맛보고, 지금은 깊은 요령을 터득했기 때문이리라.
하여간 목사는 설교자라고 하는 정체성에만 기대어 지역교회 담임목사로서 역할을 제대로 감당할 수가 없음을 절감하게 되면서부터 목양자로서 목사의 역할을 점점 익혀가고 그 마음을 알아가고 있다. 주님께서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를 위해 나를 설교자요 목양자로 보내셨다고 하는 생각이 정립되면서 오히려 감사한 마음이 더 들게 되었다.
여기에다가, 나는 최근에 심중에 각인되고 있는 목사의 제3의 정체성을 추가하고 싶다. 그것은 바로 장수(將帥) 혹은 성주(城主)로서의 목사상이다. 목사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따라 그 자리에 세워진 지역교회를 지키는 성주와 같은 역할을 한다.
일전에 여러 목사들의 모임에서 들은 말이 있다. 목사들은 참 통솔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일종의 ‘분봉왕’이기 때문이다. 각 지역교회에서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고집도 세고, 하나로 이끌기도 어렵다고 하는 푸념이었다. 목사에 대한 부정적 인식에 기초한 조소에 가까운 유머였다.
그러나 항상 모든 표현들 속에서 일말의 진실이 담겨있다. 존 맥아더 목사가 말한 것과 같이 지역교회 목사들은 실제로 성을 지키는 성주와 같은 역할을 감당한다. 중세 봉건시대를 생각해보면, 각 성의 영주들의 가장 중요한 책임은 성의 안전을 유지시키는 일이었다. 그래서 영주들은 기사들을 세워서 그 일을 감당하도록 한 것이다.
종교개혁운동 시기에 천주교와 개신교 사이에서 발생한 진리 전쟁의 와중에서 각 도시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신앙의 색깔들을 분명히 하도록 강요받았다. 이때 각자의 입장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했던 것은 그 성의 성주와 핵심 그룹들이 어떤 입장을 따르느냐는 것이었다. 그들의 신념에 의해 그 성 전체가 종교개혁의 품으로 돌아오기도 하고, 아니면 구교의 편에 남아 있기도 하게 된 것이다.
현대 사회는 중세의 제도와는 완전히 달라져 있다. 개교회주의가 만연되어고 있고, 대표성도 심각하게 약화되었다. 그러나 이런 시대 속에서라도 우리 목사들은 내가 목회하고 있는 마을 혹은 도시의 영적인 안전을 보호하도록 부름받은 성주 혹은 장군의 위치에 서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으면 좋겠다.
목사로서 자기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좋은 목사들이 곳곳에서 맡겨주신 자신의 몫을 충성스럽게 감당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