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508주년을 맞이하며
종교개혁은 지금도 가능한가?
8년 전,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했을 때 여기저기서 쏟아졌던 질문은 “지금도 종교개혁이 가능한가?”였다. 기독교에서 내로라하는 사람들은 사석, 인터뷰, 토론회, 공식 발표, 학술 문서 등다양한 통로를 거쳐 자신들의 견해를 소나기처럼 쏟아냈다. 그러나 그렇게 끓어 오르던 담론은 그저 기념행사의 일환일 뿐이었다. 마치 납덩어리가 물속에 가라앉듯, 말들은 이내 사라졌고 아무런 변화도 남지 않았다. 말을 했던 사람들에게도 말을 들었던 사람들에게 뭔가 특별한 변화는 발견되지 않는다. 이제 김이 빠진 듯한 이 시점에서 다시 묻는다. 종교개혁이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이며, 오늘 우리에게도 그것이 가능한가?
종교개혁이 가능했던 첫 번째 이유는 교회와 사회가 절실히 개혁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로마-가톨릭의 부패로 말미암은 염증과 환멸이 사회 전반에 짙게 깔려 있었고, 일반 신자들조차 신학적 지식은 부족했지만, 일상적인 체험 가운데 종교의 타락을 심각한 문제로 여겼다. 그리하여 개혁은 특정 신학자의 전유물이 아니라, 다양한 계층의 공동 관심사가 되었다. 지배층에서는 선제후, 귀족, 영주들이, 전문가 집단에서는 학자, 은행업자, 인쇄출판업자들이, 일반인들 가운데는 농부, 상인, 장인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여성들의 역할 또한 중요했다. 개혁자들의 아내 들은 물론, 왕실의 여성들과 각 도시의 유력 여성들이 앞장서서 개혁의 불씨를 지폈다. 오늘날 종교개혁이 다시 가능하려면, 신자들의 각성과 참여가 절실하다. 그러나 지금은 교회 안에서 신자들의 목소리가 사라졌다. 이미 지역 교회 안에 ‘작은 교황제도’처럼 굳어진 세력이 버티고 서서, 신자들의 영혼이 질식되고 그들의 음성은 점점 미약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은 또한 문서 전쟁이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발명 이후 유럽 전역에는 출판사들과 출판물이 넘쳐났다. 특히 종교개혁 진영은 자국어 성경을 신자들의 손에 들려주어야 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성경 번역에 열을 올렸다(이에 대응하여 가톨릭 진영도 성경출판에 힘을 쏟았다).
1522년에 출판된 루터의 독일어 신약성경은 권당 책값이 돼지 한 마리 또는 송아지 반 마리 값에 달하는 고가였지만, 그의 생전에 비텐베르크에서만 10만 권이 넘게 팔렸다. 인쇄술 덕분에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끊임없이 책을 출판했다. 거짓 종교와 거짓 신앙을 극복하기 위해 성경 해설서와 교리 교육서가 주종을 이루었다. 묵직한 양질의 책들은 신자를 깨우치고 교회를 소생 시켰다. 안타깝게도 우리 시대는 두 가지 문제에 봉착해 있다. 교계에 가벼운 책들이 난무하고, 신자가 책을 읽지 않는다. 만 쪽짜리라도 진리가 담겨있지 않거나, 한 쪽이라도 진리를 읽지 않으면 종교개혁은 일어나지 않는다.
종교개혁은 또한 논쟁의 결과였다. 진리와 거짓을 가리기 위해, 그리고 진리를 더 확실하게 밝히기 위해 개혁자들은 수많은 논쟁을 치렀다. 1517년 늦가을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교회 정문에 95개 조항을 내걸어 논쟁을 유도한 것을 비롯해, 가톨릭 신학자 요한 에크와의 라이프치히 논쟁, 츠빙글리가 가톨릭을 비판한 취리히 논쟁, 떼오도르 베자가 대규모의 가톨릭 세력과 벌인 뿌와씨 논쟁 등 이루 다 열거할 수가 없다. 그 결과 수많은 논쟁서들과 변증서들이 세상에 나왔 다. 반면 오늘날 교회와 교단과 교계에 분명히 잘못된 생각이나 주장이나 행실이 유포되고 있는 데도 모두 쉬쉬하면서 입을 다물고 있다. 문제를 지적하고 오류를 비판하지 않는다. 인정 때문인 지, 인간관계 때문인지, 괜한 시비에 휘말리기 싫어서인지, 그 일로 시간을 쓰거나 스트레스 받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인지,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덮고 지나간다. 그 결과, 왜곡된 사상과 잘못된 관행이 교회 안에 뿌리내리고 세력을 키워, 개혁의 가능성조차 짓밟고 있다.
조금 엉뚱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종교개혁이 가능했던 또 다른 이유는 초기 개혁가들이 대체로 미혼이었기 때문이다. 루터는 수도사였고, 츠빙글리는 사제였고, 칼뱅도 미혼이었다. 그들은 일신상의 문제로 매일 것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물론 그들도 이후에 결혼했지만, 이전에 다져진 개혁 의지는 변하지 않았다. 지금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어려운 이유는 교회 지도자들에게 ‘잃을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자리와 명예, 이해 관계가 얽혀 있다. 지도자들이 자기를 비우고, 내려 놓고, 희생할 때에만 참된 개혁은 다시 가능하다. 그것이 종교개혁이 가능할 수 있는 결정적인 방도 가운데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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