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신학 기획 유아세례, 다시 개혁신학의 자리에서(6)
유아세례와 성만찬
이남규 교수+합신 조직신학
세례는 신자의 자녀인 유아에게도 베풀 수 있지 만, 성만찬은 “오직 자신을 살필 수 있는 나이에 이르러 그런 능력을 가진 자에게만” 시행된다(웨 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177문). 그러므로 유아세 례를 받은 교인은 성장하여 ‘자기를 살피고’(고전 11:28~29) 교회 앞에서 공적으로 신앙을 고백한 뒤성만찬에 참여한다. 그때까지 교회와 부모는 말씀 으로 가르치고 함께 기도하며, 자녀가 믿음의 내용을 이해하고 스스로 고백하도록 꾸준히 권면해야 한다.
그렇다면 유아세례 교인의 언약적 지위는 무엇인 가? 유아세례 교인과 입교한 세례교인은 보이는 교회의 회원으로서 언약의 지체이며 사랑의 판단에 따라 보이지 않는 교회의 회원으로 여겨진다는 면에서 차이가 없다. 도르트신경 첫째 교리 17조항은 “자녀들은 부모와 함께 이 은혜언약 안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경건한 부모는 하나님께서 유아 때이 생애에서 부르신 자녀의 선택과 구원에 대해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고백한다. 이 조항은 신자의 자녀가 갖는 언약의 신분을 선택과 동일시하지 않으면서도, 선택과 분리하지도 않는다. 즉 자녀가 갖는 언약의 신분이 선택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의미하며, 특히 유아기에 세상을 떠난 자녀의 선택과 구원에 대해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부모와 교회의 사랑의 판단’을 제시한다. 이러한 판단에 따라 유아세례 교인은 자신의 신앙을 공적으로 고백하기 전까지 은혜언약의 지체로 여겨져야 한다.
이처럼 신자의 자녀들은 언약 안에 있기 때문에 유아세례를 받은 후 교회의 온갖 유익들을 맛보며 성장한다. 이들은 보이는 교회의 특권에 참여하여 “성도의 교제와 구원의 일반적 수단들을 즐김과,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누구나 구원받을 것임을 증언 하고,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오는 자는 누구도 내쫓지 않을 것이라는 복음의 사역을 통하여 보이는 교회의 모든 회원에게 권하시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누린다(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서 63문답).
이러한 특권은 곧 믿음의 의무를 동반하며, 따라 서 공적 신앙고백이 요구된다. 모든 성례에는 믿음이 요구된다. 세례를 받은 모든 이와 마찬가지로 유아세례 교인에게도 믿음이 요구된다. 교회는 “그리 스도를 믿는 자는 누구나 구원받는다”는 복음을 선포하기 때문에(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63문), 성인과 유아, 언약 안팎의 모든 사람에게 회개와 믿음을 촉구해야 한다. 언약 안에 있는 이들에게 회개와 믿음이 촉구되는 이유는 회심이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평생에 걸친 과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인이든 유아이든, 언약 안에 있는 모든 자는 믿음의 부르심을 듣고 신앙의 책임을 지닌다. 모든 교회 회원은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후 13:5)는 말씀 앞에 서야 한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는 자신의 죄 때문에 자신을 불쾌하게 여기면서, 그 죄와 나머지 죄들도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용서되었음을 믿고, 자신의 믿음을 강하게 하여 더 나은 삶을 열망하는 자가 성찬 식탁에 나아간다고 답한다(하 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 81문답). 그러므로 모든 교회의 회원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그리스도의 은택을 확인하고 믿음의 소중함을 새기며 살아야 하는 것처럼, 유아세례 교인이 신앙고백을 요구받는 것은 정당하다. 오히려 그들에게 공적 신앙고백의 기회를 뺏는 일은 신앙 없이도 언약 안에 머물 수 있다는 위험한 오해를 낳고, 언약을 그저 외적·법적 신분으로 축소할 위험을 가지고 있다. 언약의 자녀는 부여된 특권 안에서 믿음으로 응답하며, 생명의 교제인 언약을 믿음으로 누려야 한다.
이러한 교리적 이해는 곧 교회의 제도로 자리 잡아, 적절한 나이에 신앙을 고백한 뒤 성찬에 참여 하도록 하고 있다. 이는 각 사람이 자신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하기 때문이다. 아내가 남편을 대신할수 없고, 부모가 자녀를 대신할 수 없다. 교회와 부모는 언약 자녀에 대한 책임을 다해 성경을 가르치고 믿음의 도리를 전하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걸어 가야 할 길을 가르치고 권면하면서 그들의 신앙고 백을 기다린다. 만일 그가 언약을 떠난다면, 그것은 스스로 언약을 깨뜨린 것이며 그 책임은 그에게 있다. 어려서부터 많은 선한 유익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사랑과 기대 속에서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 방탕하던 둘째 아들도 돌아왔고(눅 15:20), 어거스틴도 돌아 왔다. 우리는 성령께서 오늘도 내일도 역사하신다는 소망 가운데 계속 기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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