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아세례, 다시 개혁신학의 자리에서] 중생전제설과 유아세례_이남규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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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세례, 다시 개혁신학의 자리에서(4)

중생전제설과 유아세례

 

이남규 교수/ 합신 조직신학

카이퍼의 중생전제설은 그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해설서』 제3권 72-74문의 해설에 자세히 설명되었 다. 카이퍼는 당시 자녀들이 유아기에 거의 절반이 죽어가는 형편에서 자녀들에 대한 분명한 답이 주어져야 한다고 하면서, 도르트신경 1장 17조의 “하나님께서 유아기에 이 세상에서 데려가시는 자녀들의 선택과 구원을” 경건한 부모들이 의심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 개혁교회의 답이라고 한다. 나아가 이 조항에 근거 해서 신자의 자녀들이 모태에서나 어린 아기 때에 이미 중생한다고 주장한다. 카이퍼는 “교회는 세례받는 이가 선택받았고 중생했다는 전제가 아니라면 결코 세례를 베풀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나아가 ‘중생의 씨’ 와 ‘믿음의 씨’ 개념을 가지고 와서 아직 회심하지 않았 어도 중생한 자로, 믿음의 소유자로 보아야 한다고까지 말한다. 카이퍼가 이러한 중생을 유아세례의 의무와 권리라고 규정하기 때문에 그의 주장이 유아세례와 관련해서 중생전제설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개혁신학자들은 유아의 중생에 관하여 세례 이전일지, 세례받을 때인지, 세례 이후일지 그 시기를알 수 없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때에 이루어진다고 말해왔다. 개혁교회 신조들은 유아세례의 근거로 중생이 아니라 신자의 자녀가 언약 안에 있음을 가르친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는 유아들이 “언약과 교회에 속하였기” 때문에 세례를 준다고 하며(74문), 웨스트민 스터 대요리문답서도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순종을 고백하는 양편 또는 한편의 부모에게서 태어났다는 점에서 언약 안에 있는 유아에게는 세례를 베풀어야 합니다”(166문)라고 가르친다. 따라서 이미 중생했 다는 근거 위에서 자녀에게 세례를 준다는 말은 실제 사실에 있어서 부정확할 뿐 아니라(왜냐하면 자녀가 언제 중생할지는 하나님의 기뻐하심에 달려있기 때문 이다), 성경의 가르침과도 거리가 있다(왜냐하면 성경은 언약을 근거로 명령하기 때문이다).

유아세례의 근거는 신자의 자녀가 이미 중생했다는 전제에 있지 않다. 그렇다면 신자의 자녀는 중생하 지 않았다는 전제에서 대우받아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성장하여 불신을 드러내기 전이라면 언약의 자녀는 사랑의 판단에 의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여겨져야 한다. 다시 그렇다면 카이퍼의 중생전제설과 언약 안에 있어서 사랑의 판단을 받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는 가? 카이퍼는 소위 심겨진 중생의 씨가 있다고 말하면서 아직 회심하지 않았더라도, 그래서 20년, 30년, 나아가 60년 후에 믿음을 드러낼지라도 중생했다고 본다. 즉, 언약의 자녀들이 믿음과 회심에(회심으로) 나아오기 위해서 교회에서 그들을 위한 말씀 사역은 늘필수적으로 남아 있어야 하는데, 중생전제설은 아이는 이미 중생했고 언젠가 믿음을 드러낼 것이라는 추정 아래서 말씀 사역의 진지함과 무게를 약화시킨다.

그러므로 바빙크는 중생전제설의 실천적 유해성 세가지를 언급한다. 첫째, 헛된 안심이다. 어떤 이가 실제로는 중생하지 않았으면서도 중생했다는 헛된 안심 가운데에 머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어떤 이가 “내가 아직 회심하지 않았지만 내 안에 중생의 씨가 심겨져 있고 언젠가는 이 믿음이 드러날 거야”라고 헛되이 안심하며 실제로는 멸망할 수 있다. 개혁교회는 이러한 거짓 확신을 염려했으며 자신을 살피는 설교를 권해왔다. 둘째, ‘잘못된 방관’이다. 중생전제설은 말씀 사역자로 하여금 ‘잘못된 방관’에 도피하게 할 수 있다. 즉, “어쨌든 중생했으니 언젠가는 믿음을 드러내겠 지”라고 방관하면서, 회심과 믿음을 요구하는 설교의 진지함과 능력을 빼앗긴 채로 사역한다는 것이다. 셋째로 바빙크는 중생전제설이 자칫 복음의 보편적 선포를 간과하게 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개혁교회는 선택교리를 고백하면서도 동시에 복음의 약속이 모든 사람에게 전파되어야 한다는 교리도 고백한다. 도르트 신경 2장 5조는, “나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 스도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는 것이 복음의 약속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기뻐하심에 따라 모든 백성과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시는 데, 이 복음의 약속은 회개하고 믿으라는 명령과 함께 구별이나 차별 없이 모든 사람에게 알려지고 전파되어야 한다”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중생전제설의 논리는그 대상을 중생의 씨를 품은 자로 축소하고, 말씀의 역할을 이미 중생한 자 안에 있는 중생의 씨를 발아하는 기능으로 축소해 버릴 수 있다. 아니다! 설교자의 선포는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면 새생명을 창조하는 능력의 말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