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신학] 기획 유아세례, 다시 개혁신학의 자리에서(2)_이남규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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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신학

기획 유아세례, 다시 개혁신학의 자리에서(2)

이남규 교수/ 합신 조직신학

언약 안에 있는 자녀들 – 유아세례의 정당성

“왜 유아세례를 베푸는가?”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이 질문은 여전히 제기된다. 유아 세례가 우리 교회에서 시행됨에도 불구하고, 그 성경적 근거나 정당성을 모른 채 유아세 례의 무익함을 말하거나 심지어 침례교회 등에서 행해지는 ‘헌아식’을 긍정적으로 여기는 이들도 있다. 유아세례의 무익함을 주장하는 이들은 유아세례를 받고 장성하여 교회를 떠나는 이들을 예로 든다. 그러나 이것은 비단 유아세례만의 문제가 아니다. 신앙을 고백하고 성인세례를 받은 이들도 후에 교회를 떠나는 경우들이 있기 때문이다.

언약의 외적 표징이 내적인 믿음과 일치 하지 않는 사례는 성경에서도 발견된다. 사도행전 8장에 나오는 마술사 시몬은 세례를 받았으나 성령을 돈으로 사고자 하여 사도의 책망을 받았고, 데마는 바울의 동역 자로서 한때 복음 사역에 참여했으나 세상을 사랑하여 떠났다(딤후 4:10). 이처럼 유아세례뿐 아니라 성인세례에서도, 언약의 외적 실행과 내적 실행 사이의 불일치가 발생할 수 있다. 이러한 불일치에 대해서 예수 님께서 가라지 비유로 말씀하신 바 있다(마 13:24-30). 주님께서는 이러한 불일치를 아시면서도 세례를 주라고 명령하셨다. 은밀한 마음의 상태까지 판단할 권한이 우리에 게는 없다. 지상에서 교회는 주님께서 주신 명령에 따라 언약의 증거를 보고 세례를 베풀 뿐이다.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다. 우리가 로마 가톨릭처럼 소위 사효적으로(ex opere operato), 즉 세례 행위 자체에 의해서 모든 죄가 사해지고 중생하고 의가 주입되기 때문에 세례를 베푸는 것이 아니다. 로마 가톨릭은 세례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조산사 등에 의한 비상세례까지 허용 하였다. 개혁교회는 이러한 세례이해를 개혁 했으나 유아세례를 무효화하지 않았다.

개혁교회에서 성인에게는 입술의 신앙고백이 언약에 참여할 권리의 증거라면, 유아에 게는 신자의 자녀로 태어난 사실이 그 증거 다. 신자의 자녀라는 이유로 유아가 신앙고백 없이 세례를 받을 수 있을까? 믿음이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세례를 준 것이 부당 하지 않은가? 이 물음은 이미 종교개혁 당시 재세례파가 던진 질문이었다. 개혁교회는이 질문에 언약의 통일성으로 답했다. 개혁 교회가 언약론을 강조하게 된 계기가 유아세례 정당성 변증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이 동일한 언약이기 때문에 할례가 유아들이 스스로 답할 수 있기 전에 행해졌듯이 할례를 대체한 세례도 그들이 스스로 답하기 전에 주어진다. 재세례파와 논쟁했던 츠빙글리는 이렇게 말한다. “아브라 함의 후손들처럼 그리스도인의 유아가 똑같이 언약, 교회, 또는 계약 안에 있다. 지금 기독교회 안에 그들이 있다면, 당신은 그들에 게서 언약의 표를 빼앗아야 하는가?” 하나 님은 한 개인에게만이 아니라 그의 후손과도 언약을 맺으신다고 친히 말씀하셨다(창 17:7).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 아래서 옛 언약 이나 새 언약이나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동일한 약속을 받는다(롬 4:16).

구약에서 할례라는 외적 표가 가리키는 것은 내적 표, 곧 마음의 할례이다(신 30:6).
표면적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성령에 의한 마음의 할례가 참 할례이다(롬 2:29). 할례는 믿음으로 얻는 의로움을 인치는 성례였 다(롬 4:11). 구약의 할례를 대체한 것이 신약의 세례다.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 2:11-12). 아브라 함의 후손인 유아들이 언약의 표징(할례)을 받은 특권을 누렸듯이, 새 언약 아래 있는 신자의 유아들에게서 언약의 표징(세례)을 뺏을 수 없다.

유아세례 반대자들은 “유아에게 세례를 주라”는 명령이 성경에 없다는 것을 근거로 삼지만, 언약의 통일성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유아세례를 금지하는 명령이 성경에 없다는그 사실이 유아세례의 정당성을 강력히 증거 한다. 나아가 신약에서 우리는 “너희와 너희 자녀”에게 주어지는 약속이라는 구약의 표현을 만난다(행 2:39). 고넬료에게 복음이 전해질 때에 “너와 네 온집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한다. 빌립보 감옥의 간수도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는 약속을 받는다. 실제로온 가족이 세례를 받는다(행 16:15, 16:33, 18:8, 고전 1:16).

침례교는 유아세례를 반대하면서 헌아식 (獻兒式)을 행한다. 헌아식은 신자의 자녀가 하나님 앞에서 특별한 위치에 있음을 인정 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유아세례의 정당성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성경은 믿는 부모에게 자녀를 언약의 자녀로 양육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자녀들은 권면을 받으며(엡 6:1) 성경을 배운다(딤후 3:15). 어떤 부모가 유신 론과 무신론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자녀를 중립적으로 교육하겠는가? 신자의 자녀는 하나님의 자녀로 어려서부터 양육받는 특별한 권리를 갖는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누리는 언약의 특권이다.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부모들도 자녀를 가치 중립적으로 양육하지 않는다. 입술의 고백이 없다는 이유로 세례를 주지 않으면서도, 자녀들을 언약 밖에 둘수 없다는 긴장이 헌아식의 배경이다. 그 결과 자녀는 신앙고백이 없으므로 언약의 자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헌아식을 통해 언약의 자녀로 대우받는 모호한 지위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헌아식을 제정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 친히 제정하시고 약속을 인치시는 유아세례라는 성례가 있는 상황에서, 헌아식으로 하나님이 제정하신 성례를 대체하려는 시도는 성경의 언약적 관점 에서 부당하다. 우리의 자녀는 헌아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약속하시고 인치시는 세례로 언약의 표를 받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