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그노 이야기 60
사선에 선 목회자: 개혁파의 포효 베자
제공: 프랑스 위그노 연구소(대표 조병수 박사) 경기 수원시 영통구 에듀타운로 101
[비레, Bèze의 Icones(1580)]
깔방의 뛰어난 동료이자 후계자 떼오도르 베자(Theodore de Béze, 1519-1605)는 베즐래(Vezelay)에서 행정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 모친을 여읜 베자는 파리 에서 자라면서 아홉 살 되던 1528년에 깔방의 은사이기도 한 볼마르를 만나 자연 스럽게 신교 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1544 년 베자는 평민의 딸 드노스와 비밀리에 결혼을 했다. 그는 앞길이 창창한 사람이 었지만 갑자기 심각한 병에 걸려 죽음에 직면하면서 비밀 결혼과 신교신앙 은닉에 심한 가책을 느끼고 세상의 삶을 허무하게 여기며 제네바로 갔다. 베자는 깔방과 인사를 나눈 후에 드노쓰와 정식으로 결혼식을 치렀고, 비레(Viret)의 설득을 받아 로잔 아카데미의 그리스어 교수로 취임했다(1549년 11월 6일).
베자는 마로(Marot)의 시편 찬송을 보충하기 시작하였고, 예정론을 정리하는 일에 몰두했다. 그는 세르베투스 같은 이단들에게 관대하지 않았다. 국왕 앙리 2 세가 왈도파를 혹독하게 박해하자 베자는 이를 중지시키기 위해 파렐과 함께 거침없이 스위스 전역을 돌면서 지원을 요청하였다. 1558년에 베자는 깔방의 제안을 따라 제네바의 그리스어 교수로 초빙 되었고, 1559년 6월 5일에는 신설된 제네바 아카데미의 초대 학장으로 취임하 였다. 베자는 귀족 출신이었기 때문에 학장으로 취임하면서 제네바 시민권을 얻었 다. 깔방은 낮은 계층 출신이었기에 베자 보다 몇 달 후, 제네바에 온지 23년만에 시민권을 받았다. 1560년 성탄절에 나바르 여왕 달브레는 베자의 담대한 개혁파 설교를 듣고는 신교를 공식적으로 받아들 였다. 이때 여왕의 아들이자 장차 국왕이될 소년 앙리 나바르는 베자에게 개혁파 신앙을 배웠다.
프랑스의 태후 메디시는 가톨릭과 위그 노의 갈등을 해결하려는 목적으로 뿌와 씨(Poissy) 회담을 개최하였다(1561년 9 월-10월). 신학자 11명과 함께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간 베자는 화체설을 비판하 면서 “하늘이 땅에서 먼 것같이 그리스 도의 몸은 성찬의 빵과 포도주에서 멀다” 는 포효로 좌중을 흔들었다. 가톨릭은 이말을 신성모독으로 여겼지만, 회담 결과로 위그노들도 낮에는 성 밖에서 예배를 드려도 된다는 “일월 칙령”이 발표되었다 (1562년 1월 17일). 그러나 1562년 3월 1일, 프랑수와 기즈 공작이 바씨(Vassy) 의 헛간에서 예배드리는 위그노들을 무참하게 살상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베자는 왕실 앞에서 학살을 가리켜 “망치를 닳게 하는 것은 모루이다”라고 거칠게 비판했다. 박해자는 피해를 입지만 위그노는 남을 것이라는 뜻이다. 바씨 학살은첫 번째 종교전쟁을 일으키는 도화선이 되었다(1562-1563). 위그노의 자문을 맡은 베자는 전쟁 중에 리용(Lyon)의 수도 원에서 신약의 전승에서 매우 중요한 문서를 입수하였다(베자 사본).
1564년 5월 27일, 깔방이 사망하자 제네바 시의회는 베자를 후계자로 선출했 다. 개혁파 최대 신학자 베자는 깔방의 신학을 학문적으로 크게 발전시켰다. 깔방의 사후에 베자는 즉시 “깔방의 생애”라는 고전적인 전기를 출판했다(1565년).
1571년 4월에 베자는 라로쉘에서 개최된 제7차 총회에 두려움 없이 참석하여 의장을 맡고 12년 전에 작성된 프랑스 신앙고 백서를 공인하였다. 1572년 8월 24일, 파리에서 시작된 바뗄레미 대학살은 전국으로 확산되어 셀 수 없이 많은 위그노들이 살상을 당하였다. 끔찍한 대학살을 목도 하면서 베자는 “행정관에 관하여”를 저술 하여 기독교인은 폭군에 저항할 뿐 아니
라 배척해야 한다는 대담한 사상을 보여 주었다. 베자는 8번의 종교전쟁 끝에 나바르 앙리가 프랑스 국왕으로 즉위하자 위그노 교회의 안정에 대한 소망을 품었 지만(1589년), 앙리가 프랑스 평화를 위하여 위그노 신앙을 철회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절망에 빠졌다(1593년).
베자는 인생이 서서히 끝나가는 것을 느끼자 1586년부터 매일 설교를 그만 두고 1600년까지 주일에만 설교하였다.
1598년 아카데미에서 은퇴한 후에 자신의 도서관을 처분했고, 1600년에는 아카 데미에서 마지막 설교를 하였다. 1605년 10월 13일, 베자는 86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제네바 삐에르 교회에 안장되었다. 베자는 깔방이 묻혀있는 공동묘지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다. 그의 시신을 탈취하려는 가톨릭의 위협 때문이었 다. 깔방의 후임자일 뿐 아니라 교회의 혁신자였던 베자는 사후에도 이처럼 두려운 존재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