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그노 이야기 58] 사선에 선 목회자: 선동의 글쟁이 마르꾸르_조병수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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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선에 선 목회자: 선동의 글쟁이 마르꾸르

제공: 프랑스 위그노 연구소(대표 조병수 박사)
경기 수원시 영통구 에듀타운로 101

 

[1534년 Marcourt 벽보] 

기욤 파렐은 뇌샤텔에 종교개혁을 도입한 후, 북프랑스 빠까르디 출신 엉뚜완느 마르꾸르(Antoine Marcourt, 1485-1561)를 목회자로 세웠다. 리용에서 활동하고 있던 마르꾸르는 1530년 말에 부인과 함께 뇌샤텔에 와서 둥지를 틀었고, 이듬해부터 설교와 성상 파괴 같은 전도 활동을 통해 뇌샤텔 전역과 주변에 종교개혁을 착실하게 확장시켰다. 여러 동역자들이 이 사역에 합세하였다. 1533년 7월에 리용 인쇄출판업자 삐에르 방글(Pierre de Vingle, 1495-1536)이 뇌샤텔에 왔다. 두 해 전, 그는 루터의 저술을 인쇄한 까닭에 리용에서 추방되어 베른에 잠시 머물렀고 제네바에서 르페브르 데따쁠(Lefèvre d’Etaples)의 신약성경을 출판한 후에 파렐의 요청에 따라 뇌샤텔로 온 것이다. 그는 장차 여기에서 저 유명한 올리베땅 프랑스어 성경을 출판하게 된다(1534년).

방글의 뇌샤텔 정착은 마르꾸르에게 전환점을 가져다주었다. 1533년 8월 22일, 그는 방글 인쇄소에서 풍자 저술을 출판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파는 상인 행세를 하는 성직자들을 비웃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어서 “대학자 노엘 베다의 신앙을 위한 고백과 논증”(1533. 12), 프랑스 종교개혁에 거센 역풍을 불러일으킨 벽보(1534. 10), “성만찬에 대한 유익하고 건전한 소고”(1534. 11)가 차례로 인쇄되었다.

1538년 4월, 파렐과 깔방이 제네바 의회와 심각한 마찰을 빚는 바람에 추방되자, 마르꾸르가 그 자리에 초빙되어 6월 22일부터 제네바에 발을 디뎠다. 마르꾸르는 여러 목회자와 함께 목회를 맡았는데, 정치적 권위가 영적 권위를 통제하는 것을 용인했기 때문에 파렐과 깔방의 지지자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격렬한 저항에 부딪혔다. 이 때문에 1538년 12월 31일, 마르꾸르와 동료들은 일괄사표를 던졌지만 제네바 의회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1539년 3월 12일, 파렐 및 깔방과 마르꾸르 사이에 화해의 협의가 도출되었다.

1539년, 사돌레트(Sadolet) 주교가 제네바를 가톨릭으로 돌아오도록 설득하는 서신을 마르꾸르와 제네바 시에 보냈다. 제네바 의회는 삐에르 비레가 답변을 쓸 것을 기대하면서 이 서신을 베른에 보냈지만 실제로 답신 작성은 깔방의 몫이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마르꾸르는 제네바에서 권위를 확립할 기회를 놓쳤고 오히려 깔방의 위치가 더욱 공고하게 되었다. 1450년 7월, 마침내 깔방의 지지자들이 제네바 의석의 다수를 차지하자 마르꾸르는 1540년 9월 21일 사임을 했고 깔방이 목회에 복귀하였다. 이후 마르꾸르는 여러 도시에서 사역의 명맥을 이어갔다. 1545년 10월 22일, 뇌샤텔의 담임목사가 사망하자 마르꾸르는 뇌샤텔로 복귀하려는 의향을 가졌지만 파렐의 간섭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대신에 파렐의 동료 파브리(Christophe Fabri)가 1556년 2월 20일부터 뇌샤텔 목회를 맡았다.

앞에서 말한 벽보 사건은 1534년 10월 17일에서 18일로 넘어가는 밤에 벌어졌다. 마르꾸르가 작성한 벽보 제목은 “유일한 중보자이시며 구세주이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찬에 정반대로 고안된 교황주의 미사의 가증하고 중대하고 끔찍한 오용에 관한 참된 논설들”이다. 벽보는 한 장짜리로 37x25cm 크기에 66줄을 담고 있으며 제목과 서문에 이어 네 항목을 가지고 있는데 난외에는 참고 성구들이 기입되어 있다. 벽보는 가톨릭의 사제주의, 미사, 성찬의 화체설, 우상숭배를 거세게 비판한다. 현재 여섯 장이 남아있다.

도전적이며 선동적인 벽보는 파리를 비롯해서 프랑스 주요 도시의 공공장소에 게시되었고, 심지어 엉부와즈(Amboise)에 머물고 있던 국왕 프랑수와 1세의 침실 문에도 붙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종교개혁에 호의를 보이며 독일에서 멜란히톤을 초청하여 대화를 나눌 계획을 가지고 있던 국왕은 격노하였고 벽보 게시를 국가 대역죄로 간주하면서 신교를 박해하는 쪽으로 급격하게 돌아섰다. 국왕은 가톨릭 신앙을 강화하기 위해 종교행진을 개최하여 공개적으로 직접 참여하는 한편, 벽보 공모자를 체포하여 엄벌로 다스렸다. 1534년 12월 19일, 오쥬로(Augereau)는 벽보를 인쇄했다는 죄목으로 교수형 후에 화형에 처해졌고, 1535년 1월, 부유한 상인으로 깔방의 친구였던 라 포르쥬(La Forge)가 다른 여섯 명과 함께 화형을 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