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한글성경』 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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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그 시대의 말로 번역하는 것은 위대한 가치를 가진다. 이런 의미에서 작년 12월 10일에 『새한글성경』이 출판된 것은 높이 살만한 일이다(본보 929호 4면 기사 참조). 『새한 글성경』(이하 ‘새한글’)이 머리말에서 밝히듯이 초점은 두 가지로 보인다. 첫째, 젊은이를 대상으로 삼는다. 한국어 어법에 어긋나지 않는 한, 젊은이의 어휘와 표현을 따라 새롭고 참신한 용어와 방식으로 번역한다. 둘째,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한다. 원문의 문법적 구조, 어원적 특성, 어순의 강조점까지 최대한 반영하여 원문에 가깝게 번역함으로 원문의 풍부한 의미와 분위기를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이와 더불어 새한글은 용어 통일에 신경을 쓰고 있다. 신구약에 공통된 주요 용어를 통일시키고, 신약에 인용된 구약의 번역에서 되도록 통일성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번역 원칙은 앞선 『개역개정』(이하 ‘개정’)의 오역, 어순, 용어 등을 바로 잡는 참신한 결과를 많이 낳았다. 예를 들어, 개정이 에스라 1:3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신이시라”고 한 것을 새한글은 “그의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기를”로 바로 잡았다. 욥기 3:23에서 개정은 “하나님에게 둘러싸여 길이 아득한 사람에게 어찌하여 빛을 주셨는고”라고 하였지만, 새한글은 “자기 길이 감추어 있고, 하나님이 사방을 막아 버린 사람에게 왜빛을 주시는가”로 어순을 고쳤다. 개정에서 ‘천지’처럼 한자어로 뭉뚱그려 번역한 것을 새한글은 대체로 “하늘과 땅”처럼 우리말로 풀어서 표현했다. 베냐민 지파의 왼손잡이 물매 꾼을 설명하는 사사기 20:16을 개정은 “물매로 돌을 던지면 조금도 틀림없는 자들”이라고 했지만, 새한글은 “머리카락을 향해 돌팔매를 날려도 빗나가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잘 번역하였다.

그러나 이런 참신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흠이 눈에 띈다. 새한글은 창세기 1장에서 줄곧 ‘~기를’ 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빛이 있기를”(창 1:3) 같은 것이다. ‘~기를’ 은 그 뒤에 보통 ‘바라다’ 또는 ‘원하다’가 생략되어 있는 표현이다. 빛이라는 대상이 아직 존재하지도 않는데 어떻게 바란다는 말을 쓸 수 있는가? 게다가 창조주 하나님이 단지 희망사항을 말했 다고 보는 것이 옳을까? 욥기 12:6에서는 개정처럼 ‘하나님’이 주어가 되어야 하는데, 새한 글은 ‘그들’을 주어로 삼는 문법적 실수를 일으켰다. 새한글은 원문에 없는 말을 첨가하는 과잉 번역을 자주 보여준다. 예를 들어 룻기 2:20에서 새한글은 “모르는 체 하지 않고”를 덧붙였다. 용어가 통일적으로 번역되지 않는 현상도 잦다. ‘권한’ , ‘능력’ 등 10개 이상 다양 하게 번역된 ‘엨수시아’가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신학적인 문제점도 나타난다. 창세기 6:8에서 개정이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로 번역한 것을 새한글은 “노아는 여호와의 눈에 들었다”로 번역하였고, 이후에도 이 구문을 ‘눈에 들다’ ‘마음에 들다’, ‘괜찮다’, ‘부탁하다’ 등으로 번역한다. 이런 식으로 일반화시키면 부드럽게 읽히는 대신에 ‘은혜’ 개념을 잃어버릴 위험이 높다. 이 구문이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도 사용되지만,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에서 사용될 때는 은혜의 신학을 가지고 있음을 놓치면 안 된다.

새한글 요한복음 1:14은 위에 말한 여러 문제를 망라하는 대표적인 번역이다. “그 말씀이 사람 몸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처를 두셨다”(새한글 머리말의 첫 문장). 이것은 원문에 ‘사람’이란 단어가 없기 때문에 과잉 번역이다. 또한 ‘사릌스’를 몸이라고 번역함으로 정작 몸으로 번역해야 할 ‘소마’(2:21)와 혼동을 일으킨다. 새한글은 개정의 ‘거처’라는 번역(요 14:2-3, 23)을 젊은이의 용어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자리’ 또는 ‘머물 곳’으로 고쳤 다. 그런데 본 절에서는 무슨 이유 때문인지 구태여 그대로 ‘거처’를 채용한다.

새한글이 시대의 요청을 반영하는 번역임에 틀림없지만, 가장 큰 문제는 쉽게 읽히는 용도로 기울어진 것이다. 근본적으로 성경은 술술 읽히는 책이 아니다. 오죽하면 많은 사람 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는 “누가 그 말씀을 들어 줄 수 있나요?”라고 했겠는가(요 6:60 새한글)? 그래서 쉬운 번역을 목적으로 삼는 것은 그 자체가 오류를 낳을 수밖에 없다. 번역에 너무 지나치게 많은 해석을 가미하기 때문이다. 성경 번역은 거칠고 낯설고 어색한 번역을 택해야 할 때도 있다. 어쨌든 새한글이 어떤 유익을 줄 것임은 의심할 바 없다. 머리 글이 말하는 것처럼, 교회 강단용이 아니기에 예전에 사용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역본 비교용이나 가정 예배용 그리고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에게 교육용으로는 활용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