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그노 이야기 47_ 빛나는 인물: 열혈 장군 몽고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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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그노 이야기 47 [사진/ 몽고메리의 기마 군장]

프랑스 위그노 연구소 제공 (대표 : 조병수 박사) 경기 수원시 영통구 에듀타운로 101

 

스코틀랜드 가문에서 출생한 가브리엘 드 몽고메리(Gabr iel de Montgomery, 1530-1574) 백작은 프랑스 북서부에 있는 노르망디에 영지를 가진 로르쥬와 두세이의 영주였다.

프랑스 왕들을 지지하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궁정의 총애를 받으면서 국왕 앙리 2세의 스코트 근위대 대장을 지냈다. 하지만 금빛 찬란한 인생이 보장 되어 있었던 그에게 전혀 예기치 않던 시커먼 먹구름이 돌연 몰려왔다.

1559년 6월 30일, 앙리 2세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 연회를 성대하게 베풀 었다. 한편으로는 합스부르크 왕가와 오랫동안 치른 전쟁을 종료하면서 맺은 까토-껑브레지 평화 협정을 축하하는 연회였다. 다른 한편으로, 이 연회는 두가지 결혼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하나는 국왕의 여동생 마르그리뜨와 사부와 공작 엠마누엘-필리베르트의 결혼 이었고, 다른 하나는 국왕의 장녀 엘리 사베뜨와 스페인 왕 필립 2세의 결혼이 었다. 성대한 연회가 진행되는 동안 참석자들의 흥을 돋우는 마상 시합이 벌어졌다.

이때 높은 자리에서 마상 창 겨루기를 관전하던 앙리2세가 직접 경기에 나섰다. 그는 사부와 공작과 기즈 공작 같은 여러 상대를 이긴 후에 근위대장 몽고메리를 지목하였다. 마상 시합에서 앙리 2세와 겨루는 중에 몽고메리의 창끝이 부러지면서 파편이 왕의 오른쪽 눈을 찌르고 뇌 속으로 파고드는 치명 상을 입혔다. 유명한 위그노 외과 의사 빠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국왕은 결국 열흘 후인 7월 10일에 사망하였다(위그노들은 그의 죽음을 하나님이 박해에 대한 값을 치르신 징계로 생각하였다).

앙리 2세는 임종하는 침상에서 몽고메 리의 무죄를 밝혔지만, 혐의를 벗지 못한 몽고메리는 급히 파리의 어떤 탑(몽 고메리 탑이라고 불린다)에 은신하였다 가, 자기 영지 노르망디로 돌아가 신교 신학을 공부한 후에 위그노로 전향하여 왕국과 싸우는 지도자가 되었다.

몽고메리는 제1차 종교전쟁(1562-1563)에서 위그노 진영을 편들어 싸우 면서 부르쥬를 공략하고 자기 영지 노르망디에서 여러 전투를 이끌었다. 루앙을 방어하여 적의 손에 함락되기 직전에 구원해 내는 공을 세웠다. 엉부와즈 평화 협정으로 전쟁이 끝나자 프랑스에 머물렀다. 그러나 1567년 제2차 종교전 쟁이 발발하자 다시 무기를 들고 꽁데 (Condé) 왕자의 통솔을 받으며 3년 동안 주요 전투를 치렀다. 1569년 3월 쟈르낙 전투에서 꽁데가 사망한 직후, 위그노 정치 지도자 나바르 여왕 쟌느 달브레를 그녀의 영토 베아른으로 귀환 시키는 임무를 맡았다. 베아른이 가톨릭 세력에 정복당했기 때문이다.

1569 년 8월 오르떼 전투에서 몽고메리는 속전 전략을 펼쳐 가톨릭 군대를 궤멸시 켰다. 이듬해 1월 몽꽁뚜르 전투의 생존자들을 결집시켜 꼴리뉘 제독과 꽁데와 나바르의 젊은 두 왕자의 지휘를 받으면서 가톨릭 군대를 압박하여 유리한 평화 협정을 이끌어냈다.

몽고메리는 1572년 8월 24일 바뗄레미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위그노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세느강 남쪽에 숙소를 정하고 있었는데, 위그노 군사 한 명이 부상당한 몸으로 강을 헤엄쳐 건너와서 학살이 시작되었음을 알려주어 목숨을 잃는 것을 모면할수 있었다. 살해의 특별 대상으로 목에큰 상금이 걸린 몽고메리는 가까스로 영국으로 도피하였다. 모후 까뜨린느 메디 시는 엘리자베뜨 여왕에게 몽고메리의 신병인도를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였다.

1573년 몽고메리는 왕의 군대에게 공략당하는 위그노 거점도시 라로쉘을 원조하기 위해 영국 함선을 타고 프랑스로 돌아왔다. 이듬해 그는 노르망디에서 왕국에 대항하는 봉기를 시도하였고 동프롱 성채에서 최후까지 싸우다가 항복하여 파리로 압송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다. 몽고메리는 혹독한 고문을 가하는 것으로 악명 높은 꽁시에르쥬리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1574년 6월 26일에 그레브 광장에서 참수형을 당했다. 그는 사형당하기 직전에 자기의 재산을 압수하고 자녀들의 귀족 지위를 박탈한 다는 왕명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