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제2 종교개혁을 꿈꾼다

0
4

제2 종교개혁을 꿈꾼다

종교개혁 기념 제507주년이다. 종교개혁(reformation)은 무엇인가? 라틴어를 풀이하자면 폼(form)을 다시(re) 만드는 것이다. 지금은 “폼”이라는 단어가 일반적으로 실제 형태나 모습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지만, 종교개혁이 진행되던 당시에는 물질과 재료에 대조되는 원리나 이념을 의미했다. 예를 들어, 토기장이가 질그릇을 만든다고 하자.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 진흙을 가져다가 그릇을 빚는다. 이때 머리에 떠오른 이념은 “폼”이고 진흙은 재료이다. 종교개혁 이전의 가톨릭은 “폼”(원리)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재료를 잘못 사용하였고 결국 잘못된 교회가 되었다. 일례로, 가톨릭 성당은 사제주의라는 이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제가 아닌 신자는 들어갈 수 없는 제단을 가진 건물로 건축되었다.

개혁자들이 심혈을 기울였던 개혁의 첫째 대상은 가톨릭의 잘못된 원리였다. 어떤 면에서 재료는 그대로 사용해도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종교개혁이 성공한 지역에서 개혁자들이 가톨릭 성당을 인수받아 그대로 신교 교회로 사용한 것은 이 때문이다. 루터가 활동했던 독일 비텐베르크의 쉴로스교회, 츠빙글리가 책임졌던 스위스 취리히의 그로스뮌스터교회, 칼뱅이 목회했던 스위스 제네바의 삐에르교회는 본래 가톨릭 성당이었지만 성상들과 성화들을 정리한 상태에서 신교 교회로 재사용되었다. 재료를 바꾸는 것보다 원리를 개혁하는 것이 중요했다는 의미이다. 달리 말하자면, 원리를 개혁하지 않은 채 재료를 바꾸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개혁자들이 원리로 삼은 것은 다름 아니라 성경이다. 종교개혁에서 성경 외에는 어떤 것도 기독교의 원리로 인정되지 않았다. 이것이 개혁자들을 묘사한 그림이나 동상을 보면 대체로 성경을 손에 쥐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는 까닭이다. 이 때문에 종교개혁은 시초부터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하는 데 힘을 쏟았다. 루터는 종교개혁의 기치를 들고 다섯 해가 되기 전인 1522년에 독일어로 소위 “구월 성경”(Septembertestamet)을 세상에 냈다. 루터의 신약성경은 많은 인쇄소들이 앞을 다투어가면서 출판하여 삽시간에 독일 뿐 아니라 온 유럽을 덮었다. 츠빙글리가 이끄는 취리히도 루터의 번역을 받아들여 다소의 변화를 주었지만 1524년에 독일어 신약성경을 출판하였다(“취리히 성경”). 루터의 번역에서 동기를 얻은 틴데일은 1526년에 영어로 신약성경을 출판하였다. 프랑스에서는 왈도파의 재정 후원에 힘입어 올리베땅 성경전서가 1535년에 불어로 번역되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종교개혁은 유일한 원리인 성경을 신자들에게 돌려준 것이다. 신자들은 자국어로 번역된 성경을 귀중한 선물로 받았다. 덕분에 오늘날 신자들은 교회의 지도를 따라 연중 일독을 하려고 성경읽기에 도전하고, 매주일 주보에 실리는 성경요절을 암송하고, 심지어는 성경을 필사하는 힘든 일에도 참여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처럼 여러 노력으로 성경에 접근하지만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성경을 해석하는 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에티오피아의 국고 관리가 성경을 읽기는 하지만 깨닫지 못했던 것과 같다. 종교개혁의 그림자가 길어지면서 성경해석은 마치 어느 특정 부류의 전유물처럼 되어버리고 말았다. 전에는 가톨릭에서 성경책에 접근하는 길이 막혔듯이, 지금은 기독교에서 성경해석에 접근하는 길이 막혔다.

종교개혁이 성경을 글로 신자들에게 쥐어주었다면, 이제는 신자들에게 성경을 뜻으로 알게 해주어야 한다. 성경을 읽는 신자가 바른 해석법을 따라 독자적으로 내용을 파악하게 하는 것이다. 비록 고급 신학자들처럼 학문적으로 심오하게 해석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자신이 읽고 있는 본문의 내용을 바르게 이해하는 수준에는 이르도록 말이다. 이렇게 하려면 성경을 먼저 깨달은 이들이 해석방법을 전유물로 삼지 말고 적극적으로 공개해야 하며, 또한 신자 자신이 성경 이해를 남의 일처럼 여기지 말고 본문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스스로 알아내는 능력을 적극적으로 배양해야 한다. 성경해석을 가르치는 운동과 성경해석을 배우는 운동이 함께 일어나야 한다. 성경책을 신자의 손에 들려준 것이 종교개혁이라면, 성경해석을 신자의 마음에 열어주는 것은 제2의 종교개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