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 앞에서의 기꺼운 충성으로 개혁된 교회의 최고 교단이 되어야!(막 14:26-31)
변세권 목사(신임 총회장, 온유한교회)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본문의 시간은 목요일 밤부터 금요일 새벽 사이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의식을 끝내신 후 그들을 데리고 감람산으로 나가셨습니다.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가니라”(14:26) 예수님은 감람산에 도착하여 제자들 편에서는 가슴이 철렁할 수밖에 없는 말씀을 다음과 같이 하셨습니다.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반드시 그렇게 되고야 말 것임을 강조하시고, 게다가 “성경에 예언된 바대로”라고 하셨습니다. 곧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음이니라”(14:27)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한 떼의 양 무리를 이끌고 가던 목자가 갑자기 강도의 습격을 받아 쓰러지게 될 때에 목자를 따르고 있던 양 떼들이 공포에 질려 사방팔방으로 도망가는 혼비백산의 모습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자신에게 닥칠 그 일을 생각하시는 가운데 “그렇다면 제자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하는 생각에 따라 제자들로 하여금 단단히 대비할 수 있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기록된바’란 여호와께서 스가랴 선지자의 입을 빌어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 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슥 13:7)라고 예언하신 것을 가리킵니다.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고 하신 데 대해 뒤이어진 구절에서 ‘삼분의 이’와 대조되는 ‘삼분의 일’은 ‘거기 남으리니’(슥 13:8) 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 다음 “내가 그 삼분의 일을 불 가운데에 던져 은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슥 13:9)라고 하셨고, 삼분의 일에 대해 분명 “불 가운데 던져 은 같이 연단하며 금같이 시험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삼분의 이’와 ‘삼분의 일’은 실제적인 양적 비율을 가리키지 않고 ‘다수 대 소수’를 상징합니다. 산상수훈의 표현으로 보자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3-14)라고 한데 비견됩니다. 누가복음서에는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눅 12:32)라고 하신 바대로입니다.
사탄의 밀 까부르듯 하려는 요구를 경계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보기도 전에, 성급한 성격의 베드로가 툭 튀어나옵니다. “베드로가 여짜오되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14:29) 물론 제자들로서는 마땅히 그래야만 할 것입니다. 이제껏 온갖 고생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따라다닌 것이었는데 스승에게 무슨 변고가 생겼다고 해서 한순간에 나 몰라라 하며 뒤돌아서 버린다는 것은 인간사에서 얼마나 삭막하고 실망스러운 모습이겠습니까? 그러므로 베드로가 그렇게 충성과 의리를 과시하며 나선 것은 일면 칭찬받아야 할 측면도 있는 것입니다. 다만 이제 곧 닥치게 될 무시무시한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것이었으므로 사실상 너무 성급한 것이었고 심지어 만용과 자만까지 엿보이는 태도였던 것입니다.
이는 베드로를 필두로 제자들 전체가 여전히 자기들의 위치를 구속사에 비추어 해석하기에 덜 성숙해 있음에 대한 반영인 것입니다. 언제나 예외 없이 그리고 개인이든 교회이든 간에 구속사관(救贖史觀)의 부재와 오류는 교만과 자만으로 이어집니다. 사람의 뜻과 의지로써 하나님의 일을 하려 들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좀 더 생각을 깊이 할 수 있기를 바라십니다. 따라서 다시 한 번 겸손케 하려고 다음과 같이 매우 직설적인 표현으로써 경고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14:30) 하지만 베드로를 필두로 제자들의 의기충천(意氣衝天)은 여전합니다. “베드로가 힘 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14:31).
고난 앞에서의 기꺼운 충성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혹 예수님께서 지금의 우리에게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라고 하신다면 과연 우리들 각인은 어떻게 반응할 것이겠습니까? 앞에서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처럼 곧 “힘 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는 식으로, 물론 그것은 잘못된 만용이었지만, 그나마 그렇게라도 할 수는 있는 것이겠습니까?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직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고난) 주를 부인하지 않게 해주시옵소서(충성)!”라고 한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별 탈 없이 주님께 대한 신앙을 유지해나가고 있는 것이 우리 자신의 결단과 용기에 의한 것이었다면 우리는 베드로처럼 이미, 벌써 즉 진즉에 예수님을 부인하는 배은망덕을 수없이 되풀이했을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내가 할 수 있다’ ‘내가 한다’ ‘내가 했다’ 등의 사고방식은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이 문제 앞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걸려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정리와 결론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고난) 주를 부인하지 않게 해주시옵소서(충성)!”라고 한 자세는 거듭난 새 생명의 실력 곧 ‘부활된 생명력’을 이 땅에서부터 누리는 성도에게서 나타나는 특징들 중의 하나입니다. 이러한 신앙은 우리의 존재 이유이고 감당해 나가야 할 교회적 사명입니다. 그렇게 서 가노라면 여하튼 성령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이는 도구로 가장 필요하고도 효과적으로 쓰실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교회들의 가장 결정적인 결함은 곧 종교개혁의 전통을 저버린 데 있습니다. 우리 합신총회는 이를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 역사 속에서 개혁된 교회의 생명을 잘 이어받고, 현 시대에 잘 받아 누림으로써 자연스럽게 후대의 역사 속으로 물려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야말로 이 세상의 역사는 단연코 교회를 위한, 교회에 의한, 교회를 통한, 교회의 역사인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 한 분의 신실성에 의해서 하나님의 의가 성취되고, 사도바울 한 분의 신실성에 의해서 교회가 창설되고, 존 칼빈의 신실성에 의해서 개혁교회가 창설되듯이, 우리 한 사람의 신실한 믿음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한 지역에 세우고 싶어 하시는 온전한 교회 하나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하나의 역사적 지역교회가 참된 과거 교회와 참된 미래교회의 생명력을 계속 이어주는 가교역할을 하게 됨에 따라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의 찬란한 광채는 여전히 시간 세계 속에서 그 빛이 발휘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합신은 성경 신학의 기본토대가 잘 형성되어 있기에 언제라도 도전할 수 있고 또 잘 이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 합신총회와 교회는 고난 앞에서의 기꺼운 충성으로 개혁된 교회의 생명을 계승해야 하고, 개혁된 교회의 최고 교단이 되어야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