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과 소망(삼상 21:10-15)
홍규식 목사(대곶교회, 경기서노회)
원칙을 갖고 산다는 것은, 삶의 가치와 목적을 알고 있다는 의미다. 깨어 있는 사람, 앞서가는 사람에게는 원칙이란 기준이 있다. 성도에게도 원칙이 있다. 하나님 경외와 말씀에 절대 순종이 바로 그것이다(시 112:1, 여호와를 경외하며 계명을 즐거워하는 자의 복). 본문은 그 원칙을 망각했을 때 겪게 되는 아픔과 섭리적 은혜를 말씀한다. 긴병에 효자 없듯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오랜 고난의 시간은 삶의 원칙을 뿌리째 뽑아버린다. 일도 사람도 싫어지고, 사명감도 흐려져 어디론가 도망하고 싶어진다. 힘겹고 고된 일상이 다윗, 그를 망명길로 내몬다.
나를 지켜줄 줄 알았던 떡과 칼
다윗은 지금까지 어떤 삶의 정황(목동, 골리앗과의 전쟁, 악령의 사울 치료) 속에서도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최선의 신실과 성실을 보여 왔다. 하지만 사울의 살해 결의를 전해 듣고는 자신과 죽음 사이를 “한 걸음”이라 했듯이(삼상 20:3), 극도의 공포심에 사로잡힌 다윗은 사울의 손이 미치지 못할 곳으로 판단한 블레셋 가드(아기스)로 첫 정치적 망명을 결정한다(10; 참조: 삼상 27장). 사울과 헤어질 결심은, 다윗에게 지금까지의 생활방식과 환경의 포기를 의미한다. 망명 전, 다윗은 놉의 제사장이며 친구인 아히멜렉에게서 음식(거룩한 떡, 4-6)과 무기(골리앗의 칼, 8-9)을 얻는다. ‘왕의 비밀 작전’을 수행 중인 장수에게 양식과 무기가 없다는 궁색하고 구차한 변명을 대며, 다윗은 떡과(골리앗의) 칼을 손에 쥔다. 이 칼은 블레셋에게 자신의 정치적 ‘회심’이 진실임을 입증하는데, “그 같은 것이 또 없었기” 때문이다(9).
두려움은 오직 생존을 위한 자기방어라는 선택을 하게 만든다. “나를 지키는 것은 오직 나뿐!”이라는 생각으로 함몰된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신실한 종 다윗에게, 평소 생각지도 못했던 떡과 칼은 정치적 망명이란 광야에서 이제는 하나님보다 더 그를 지켜줄 우월한 수단으로 부상하게 된다. 그러나 칼은 칼일 뿐이다. 칼은 스스로 춤추지 못한다. 누구의 손에 그 칼이 쥐어지느냐에 따라 살인 병기거나 구원의 방편이 된다. 결국 한참 후에, 다윗은 자신을 절망의 순간에서 지켜주는 것은, 골리앗의 칼이 아닌, 전능하신 여호와의 오른손임을 깨닫게 된다(시 34:4, 6, 8, 17-19). 좌우간 다윗은 계획대로 첩자 도엑을 속이고 정치적 망명에 성공하지만(10-15), 다윗과 공모했다는 이유로 아히멜렉과 85명의 제사장은 잔인하게 도륙당하고 만다(삼상 22:17-18). 이 참사는 다윗의 정치적 망명이 낳은 또 다른 어두운 그림자였다.
도망이 아닌 소망
다윗은 생존을 위해 정치적 망명을 강행했고, 이러한 선택이 사울이라는 절체절명의 문제를 일소에 없애는 해결책이 되기를 내심 기대했을 것이다. 결국, 블레셋 적국의 최고위급 인물(장수 겸 왕)이 최고의 정치적 물건(?)을 들고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이른다. 지금까지 아기스에게 이런 정치적 호재는 없었다! 과거 다곤 신전에 놓여 있는 여호와의 궤가 이스라엘에게 블레셋에게 당한 굴욕스러운 패배의 상징이었듯이(삼상 5:1-12), 이스라엘에게 당한 블레셋의 치욕적인 패배(삼상 17:51)의 상징이었던 골리앗이 칼이 그것도 가장 두려워했던 적장, 다윗의 손에 의해 저절로 반환되는 사건은 최대의 정치적, 종교적 뉴스가 아닐 수 없다. 이 공로로 다윗은 망명국 불레셋에서 비교적 안정된 생활과 지위를 보장받을 수 있었을까?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사태는 다윗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전되고 있었다. 다윗의 이러한 정치적 의도와 결정은 결코 하나님의 뜻과 의도에 부합한 일이 아니었다. 그 반증은 곳곳에서 드러난다. 평소와 달리 다윗은 자신의 의도와 치밀한 계획에만 의존하고 하나님께 묻지 않는다. 놉의 성소에서 ‘골리앗의 칼’만 주목하고 그 칼 앞에 있는 ‘에봇’엔 관심을 두지 않는 정황들이 바로 그것이다. 지친 삶은 그렇게 성도를 믿음의 자리에서 걷어 차게 만든다. 망명이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지만, 그것은 결코 믿음의 선택은 아니었다.
아기스 신하들은 다윗의 망명에 강한 경계와 의구심을 품고, 다윗이 적국의 뛰어난 장수요 왕이라는 그의 실존적 정체성을 새삼 상기시킨다(11; 삼상 18:6-9, 천천 만만). 전혀 예상 밖의 반전은 사울이란 두려움을 피해 도망해 온 다윗에게 또 다른 두려움을 안기고 만다(12). 두려움의 대상만 바뀌었을 뿐, 다윗은 여전히 두려움 한가운데 있게 된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어디를 가든지 두려운 존재를 만나게 된다. 결국, 다윗은 놉에서 사울의 첩자, 도엑을 의식하여 아히멜렉 앞에서 연기했듯이, 두 번 다시 해서는 안 될 생존을 위한 또 한 번의 치욕스럽고 굴욕스러운 미친 몸부림으로 아기스의 의심의 촉수에서 벗어나 생존을 위한 안간힘을 써본다(13). 다윗 생애의 대본에는 이런 장면이나 연출은 없었다! 사울을 피했더니, 아기스라는 더 큰 두려움이 코앞에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회피나 도망이 낙망이나 절망을 해결하는 손쉬운 방편과 절대 영구적인 해법이 될 수 있을까? 기근 때문에 가나안 땅을 벗어나 평안과 안락을 추구했던 족장들(아브라함, 이삭)이 오히려 약속의 땅 밖에서 뜻하지 않은 생명의 위협이란 위기를 겪었듯이, 생존만을 위해 신앙과 사명을 저버린 다윗의 삶에 결코 평안은 없었다. 오히려 다윗은 아기스의 부하들의 입에서 “그 땅의 왕 다윗”라는 말을 듣고,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자신의 정체성을 새삼 알게 되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다행이다! “그렇다! 나는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이 아닌가? 그런데 하나님과 믿음, 조국과 왕의 사명을 버리고 한갓 인간의 두려움 때문에 적국에서 안위만을 도모하려 했나?”라는 깨달음 같은 것 말이다. 다윗의 미친 행동은 지금의 다윗의 영적 상태를 반증하는 것일지로 모른다(13). 사실 판단과 생각을 바꿔서 자행한 미친 행위의 ‘변화’, 변신보다는, 그에게 더 절박한 변화는 영혼의 회복이었다. 다윗의 이러한 회심?은 아기스에게 그의 정치적 이용 가치가 더 이상 없음을 입증하기에 충분했다(14-15).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극적으로 다윗은 아기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베들레헴은 아니지만, 자기 고향 땅(유다 광야 아둘람 굴)으로 향한다(삼상 22:1이하). 이제 다윗은 그 어떠한 어려움에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믿음과 사명의 자리를 버리지 않기로 다짐했을 것이다. 도망은 절망만을 낳지만, 소망은 희망을 낳는다. 아무리 심한 고생과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듯한 고통과 어려움이 있어도(고후 1:8-9), 믿음의 주 온전케 하시는 부활의 예수를 바라보면(히 12:2) 분명 도망이 소망으로 바뀔 것이다. 야곱의 하나님으로 도움과 소망을 삼는 자와 그 삶의 자리에 하나님은 참 복락과 안위, 만족과 평안함을 주실 것이다!(시 146:3-5; 시 56:3; 시 62:1-2, 5-7). 두렵고 지칠 때, 괴롭고 싫어질 때, 하늘이 무너질 때, 도망하지 말고 하나님의 임재와 그분의 구원을 체험하겠다는 소망을 갖자!(시 146: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