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수첩>
교계언론의 역할과 덕목
요즘 들어 부쩍 교회분쟁 관련기사를 많이 쓰게 된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이런 문제에 대해 다루고 싶지 않다. 이런 사건들을 자
주 접하다 보면, 교계언론의 기자이기 전에 기독인으로서 경건생활에 많은
위험요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개교회의 문제들이 발단이 되어 보편교회(공교회)의 거룩성에 대해
실망하거나 회의에 사로잡히는 오류를 범할 때도 있다. 또 인간적인 정의감
이 하나님의 말씀이 말하는 원리를 잠식하려는 유혹도 많이 받게 된다. 죄
의 현장에서 연약한 인간의 죄성(罪性)을 보며 그를 긍휼히 여기는 동시에
하나님 앞에 선 나를 돌아보고 동일한 긍휼을 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정죄
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경우도 있다. 10여 년간에 걸친 나의 기자생활을 돌아
보건대 그들보다 서푼어치 나은 누더기 같은 의(義)로 인해 자고(自高)하거
나 바리새인적인 구별의식을 가지게 된 때도 있었다.
물론 위와 같은 내면적이고 개인적인 어려움 외에
현실적인 어려움도 적지
않다.
이런 기사를 쓸 때에는 여러 가지 고민되는 부분도, 고려해야 할 부분도 많
이 있기에 매우 힘이 들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개의 경우 양쪽의 주장이 팽
팽하게 맞서기 때문에 그 속에서 문제의 핵심을 제대로 지적해내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 까닭에 이런 류(類)의 기사에 대해 불만의 소리들
도 많다.
만약 기자가 마치 사진처럼 현상을 그대로 옮겨내는 역할이어서 거기에 지극
히 충실했다고 할지라도 경우에 따라 섭섭해 하거나 만족하지 못하는 일들
이 많을 것인데, 기사엔 주관적인 ‘기자의 눈’이 투영되어 있기 때문에 더
욱 그러하리라.
오늘 글을 쓰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일을 담당하는 교계언론의 의미와 그 일
의 중요성, 또 그 일을 수행하는 기자들인 우리들이 갖추어야 할 것들에 대
해 이야기 하고자 한다. 물론 동시에 교계언론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이런 각
도에서 몇가지 생각할 여지를 던지고자 한다.
교계기자는 기독교계의 많은 문제들과 현상을 다뤄가는 일들을 부단히 수행
한다. 기자의 글에 의해 독자들은 판단기준과 사안에 대한 이해를 가지게 되
기도
한다.
당연히 기자들의 눈에는 원칙이 있고 또 당연히 있어야 한다.
특히 기자들에게는 사실보도와 객관성, 공정성, 공공성이 중요한 덕목으로
지적된다. 개인적으로 교계기자라면 여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지시하는 원리
에 기초한 기준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현상을 볼 때 판단기준이 성경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신학
함’이 필요하다. 성경을 보는 눈, 하나님과 교회를 보는 눈, 세상의 현상
을 보는 눈은 자신이 가진 신학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물론 교계기자에게는 폭넓은 정보와 많은 지식도 필요하다. 하지만 더 중요
한 것은 역시 바른 신학이라고 본다.
여기에서 기자가 말하는 ‘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정규 신학교에서 배우는
신학과정만을 국한하지는 않음을 강조하고 싶다. 풀어서 설명하자면 기독인
이라면 누구나 나름의 신학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을 통해 성경을 읽고 교회
생활을 하며 세상을 보게 된다.
문제는 어떤 신학을 가졌느냐에 있다. 우리 주변에는 건전하지 못한 신학도
있고, 이단이나 사이비도 있다.
우리는 신구약성경이 말하는 원리, 사도들이 가
르쳤던 교리, 속사도들이 가
졌던 신앙체계, 종교개혁자들이 되찾았던 성경관에 부합하는 신학을 가져야
한다.
따라서 보편교회의 일원으로서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를 섬기고 세워가는 일
에 특정한 임무가 있는 기자들에게 필요한 신학이라면 가장 성경과 조화되
는 신학, 역사적으로 정통교회가 고백해온 신학을 부단히 공부하고 연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물론 여러 분야의 사안들을 취재하고 기사를 작성하다보면 기자들의 신학적
안목과 해석에 한계가 있을 수 있으며, 그러할 때를 위해 존재하는 교회의
선생들인 신학자들을 찾아 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교계언론을 접하는 기독인들에게도 이같은 바른 신학이 필요함은 물론이다.
현상에 깊이 함몰되다보면 종종 자신의 형편에 따른 상황논리나 정의감, 악
에 대해 저항하는 고통이나 슬픔으로 인해 말씀의 원리보다 종종 가까운 힘
의 논리나 권모술수에 의존하게 되곤 한다.
이때에는 주변에서 어떤 이야기를 해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문제는 여기
에 있다.
과거 신앙의 선진들은 자신들의 논리나 철학을 펼치다가도 누군가가 “하나
님의 말씀이 이렇게 말하고 있다”고 하면 그 앞에서 경외심을 가지고 자신
의 논리를 내려놓곤 했으나, 오늘날은 구약의 사사시대와 같아서 ‘자신의
소견에 옳은 대로’행하는 시대가 되고 말았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아니라, 나의
견해와 우리의 의견이 기준이 된 시대이다. 말씀을 나의 논리에 짜 맞추고
끼워 넣으며 하나님의 뜻을 이야기한다. 너도나도 그러다보니 무엇이 옳은
지 그른지 판단하기가 너무 힘들다.
이리저리 얽혀버린 세상 속에서 교회의 선생된 신학자들도 자신들의 입지나
유익, 보신을 위해 바른 진리를 말하려 하지 않는다. 아니 자신의 유익을 따
라 고의적으로 진리를 왜곡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 속에서 이 땅에서 소
금과 빛이 되어야 할 교회가 맛과 빛을 잃고 타락하고 있다.
교회와 신학은 서로를 감시하고 견제하면서 동시에 보호하고 유지해가야 한
다. 하지만 오늘날은 교회와 신학이 서로의 목적을 위해 적당히 타협하고 결
탁하여 부담스러운 진리를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지 걱정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교권을 잡은 일부 세력들이 욕망에 사
로잡힌 신학자
를 부추기고 때로는 위협하여 자신들의 논리를 정당화할 해석을 요구하고 있
다는 말이다.
우리시대에는 적당히 바르고 적당히 말하며 적당히 의인이 되면 존경받지
만, 말씀대로 말하고 원리대로 지적하면 찍혀나가거나 비난받는 시대이다.
교회도 이러한 논리에 지극히 충실하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 그분의 영광과 진리를 드러내야 할 교회와 신학
이 침묵하거나 타락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우리를 절망하게 하고 낙심하게
할 일인가.
이러한 구조적 잘못들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일을 위해 교계언론이 존재한다
고 생각한다.
다수가 외면한 원리를 소수의 입을 빌어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하며, 협착한
가시밭길을 따라 존재하는 진리의 음성에 귀 기울이도록 하는 일, 번영과 성
공의 열매 앞에서 놓쳐버린 십자가를 말하는 일, 교회와 신학이 침묵하는 하
나님의 뜻을 조명하는 일들, 바로 그것을 위해 교계언론이 존재한다. 물론
현실은 여기에서 우리에게 절망을 안겨준다.
하지만 교권이나 금권에 좌우되지 않으며 이러한 일을 묵묵히 그러면서 부단
히 행해가는 교계언론의 필요성은 너
무나 중요하다. 독자들의 중요성은 여기
에 존재한다.
먼저 기사를 바르게 읽어낼 힘을 길러야 한다. 많은 기사들의 경우 객관적이
고 논리적일 수 있으나, 성경적인 안목과 해석을 담고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
다. 독자들은 이것까지 읽어낼 수 있어야 교회를 바로 세워갈 수 있을 것이
다.
그러한 기사가 실리는 언론에 관심과 기도를 집중해야 한다. 그런 언론은 대
개 수익성에서는 취약하기 마련이다.
눈과 입에 달콤한 기사가 교회를 마비시키고 나아가 죽일 수도 있음을 충분
히 인식해야 한다.
또 바른 신학과 신앙의 모습을 고민하며 주변에 전파해야 한다. 동시에 스스
로와 교회를 성경의 원리위에 잘 세워가는 일을 계속해야 한다. 늘 우리의
기준은 성경이지 합리성이나 논리, 정의감이나 다수의 생각, 성공이나 번영
이 아님을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할 때 우리들의 말씀에 대한 경외심과 기도, 거기에 대한 순종의 노력들
이 종국에는 하나님의 교회를 든든히 세워가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본연의 창조목적과 부합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