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통하는 자만이 누리는 위로
< 노천상 목사, 예림교회, 기독교세계관학교 교장 >
“현재의 어려움 속에서도 기쁨과 위로 누리는 신자 되어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애통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연적인 의미의 애통이 아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는 전혀 복이 될 수 없다. 그렇다고 자연적인 슬픔에 가득 찬 사람이 아니다. 또는 병적으로 슬픔에 젖어 있는 사람도 아니다. 나아가 병적으로 침울한 사람도 아니다.
산상수훈은 모두 사람의 영적인 상태와 영적인 자세를 말씀하고 있다. 따라서 본문에 애통은 영적인 애통을 말한다. 이 애통은 죄를 깨닫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자신의 죄에 대한 철저한 인식을 통해 영적인 무력감과 절망적인 현실을 바라봄으로 인한 애통인 것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 내랴!”(롬 7:24)와 같은 부르짖음과 같이 자신의 죄와 비참함을 보면서 너무나 큰 충격과 비탄에 빠져서 고통 중에 부르짖는 사람, 그 사람이 애통하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이런 체험을 하고 예수 그리스도께 나온 사람들이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비추시면 우리의 죄악과 파탄의 상태를 깨닫게 되고, 냉랭하고 돌같은 마음이 부셔지는 아픔과 고통 속에서 애통하게 되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감사함으로 영접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죄에 대해 아무리 많이 슬퍼하거나 애통하는 것이 아무리 많아도 지나치지 않다. 오히려 죄에 대한 깊은 가르침과 기쁨에 대한 진정한 이해, 이 두 가지가 합력하여 이처럼 애통하며 동시에 위로를 받는 복되고 행복한 사람을 만들어 낸다.
그렇다면 ‘위로’란 무엇인가? 죄용서의 기쁨과 양심의 자유와 안식과 평강이다.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자리에서 하나님과 화목되고 연합된 기쁨, 하나님의 영광의 복에 참여하는 기쁨이다. 이것이 진정한 위로이다(사 66:2; 66:1-3; 시 30:5, 11; 126:5-6).
세상의 자원으로 스스로 위로를 찾는 자들은 결코 이 위로를 경험할 수 없다. 도리어 허무와 절망과 영원한 멸망 밖에는 그들을 만나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애통을 아는 그리스도인이라면 현세에서 이 위로를 누릴 뿐만 아니라,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서 완벽한 위로를 누리게 될 것을 소망하면 살게 된다.
그러므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며 온유한 사람이지만, 진지하고 강한 사람이다.
그는 모든 사람과 모든 행사를 외모로 판단하지 않는다. 영적인 시각으로 자신과 사회에 만연한 죄와 죄의 영향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현재의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진지하고 엄숙하면서도 기쁨과 위로를 누리는 사람이다. 그는 위엄 있고 침착하면서도 절대로 냉정하거나 냉소적이거나 부정적인 사람이 아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닮아서 죄를 미워하고 세상의 죄에 대해서 탄식하면서도 ‘그 앞에 올 즐거움을 바라보면서’ 십자가와 조롱받는 것까지도 피하지 않고 꿋꿋하게 견디는 사람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깊이가 있고 무게가 있다. 늘 진지하면서도 늘 행복한 사람이다. 거룩한 기쁨과 위로 가운데 행하는 사람이다. 이것이 애통하는 사람이며 그리스도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