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구하는 교회로 회복하자_문민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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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구하는 교회로 회복하자

 

< 문민규 목사, 반석교회 >

 

 

“칼빈주의는 정의와 긍휼과 믿음으로 교회의 본질 회복하는 원동력”

 

 

2001년 9월 11일 뉴욕 멘하탄 세계무역센터를 가로지른 항공기 두 대의 충돌로 2,749명의 미국 시민이 사망하는 테러가 발생했다. 미국을 공포로 몰아 놓은 이 사건이 발생한 직후 ‘뉴욕타임즈’지에는 의미 있는 논쟁이 발생했다.

 

‘오리엔탈리즘’의 저자 에드워드 사이드, ‘문명의 충돌’의 저자 새뮤엘 헌팅턴, ‘숙명의 트라이 앵글’의 저자 노암 촘스키, ‘근대 세계체제론’의 저자 임마누엘 월러스타인 등 세계적으로 유명하다는 보수와 진보 논객들이 이 논쟁에 참여했다.

 

보수적 논객들은 미국의 즉각적 응전을 하려는 지도자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논조를 주장했다. 반면에 진보 입장의 논객들은 보복적 전쟁을 준비하려는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을 향해 “테러는 극우파에게 하나의 선물”이라며 보복 전쟁의 주장을 질타했다. 만일 우리나라에서 911테러와 같은 사태가 발생했다면 어쩌면 획일적이고 선동적인 논조가 온 매스컴을 압도했을 지도 모른다.

 

이처럼 양쪽 진영의 논쟁이 대립하고 있을 때 마이클 왈쩌는 뉴욕타임즈(2001년 9월 21일 자)에 전 세계의 지성인들에게 길이 기억에 남는 글을 기고했다. 그 사설의 제목은 “야만의 방식이 아닌 문명의 방식으로 답하자”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미국은 2년을 채 넘기지 않고 마침내 보복전쟁을 치르기 시작했다.

 

인도의 정신적 지도자인 마하마트 간디는 반영불복종운동으로 비폭력 저항이라는 특이한 방법으로 결국 인도를 영국의 식민지에서 해방시킨 바 있다. 간디의 이러한 저항운동의 근거는 신약성경의 산상수훈이라고 한다. 당시 마이클 왈쩌는 아모스서를 통해 사회적 비판가들에 대해 “야만의 방식이 아닌 문명의 방식으로 답하자”는 의미있는 주장을 펼쳤던 것이다. 이처럼 사상가나 정신적 지도자들 중에는 성경에서 자신의 사상을 취하는 것을 보게 된다.

 

기독교, 즉 프로테스탄트의 정신은 말 그대로 저항사상이다. 이 저항사상을 잘 드러낸 학자가 바로 칼빈이다. 칼빈이 제네바에서 교회지도자로 있을 때 그는 교회개혁을 통해 제네바 사회에까지 개혁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제네바 시의회는 번번이 칼빈의 사회 개혁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그때마다 칼빈은 묵묵히 제네바 시의회의 제동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결국 제네바 시는 칼빈의 사회 개혁을 점차 수용하게 되었다.

 

칼빈 이후 계몽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성경해석의 주도권을 인본주의자들이 득세하면서부터 교회는 빛을 잃게 되어 칼빈주의가 가졌던 설득력과 영향력의 많은 부분을 상실하게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양 사회에서는 칼빈주의의 영향을 받아 꾸준히 사회 개혁을 추구해오고 있다. 지금도 어떤 사회적 위기가 오게 되면 비록 소수이기는 하지만 기독교 정신에서 나온 논조가 설득력을 갖기도 한다.

 

반면에 우리가 몸담고 있는 한국교회의 모습은 너무나도 초라하다. 교회가 개혁되고 사회를 개혁하는 신앙의 실천적인 모습을 전혀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타락한 사회로부터 교회가 개혁되어야 한다는 비판과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왜 한국교회는 사회개혁에 대해 오히려 후퇴하는 모습을 보일까? 그 원인은 무엇보다도 한국교회의 성경해석에서부터 찾아야 한다고 본다. 한 예로써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마 23:23-24)를 들 수 있다.

 

여기에서 ‘율법의 더 중한 바’에 대한 해석과 ‘소경된 인도자’는 누구이며, 그들은 무엇을 버리고 있고 그들의 행위에 대한 예수님의 지적이 무엇인가는 분명하게 밝혀지고 있다. 그리고 이 논조의 초점은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버렸다는데 있다.

 

칼빈 시대의 교회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구했다. 그리고 그들은 목숨을 담보로 하여 올곧게 신앙을 내세웠다. 제네바에서 칼빈이 목회 활동을 하면서 중점을 둔 사역 중 하나는 선교활동과 더불어 제네바로 피난 온 종교적 난민들에 대한 구제활동이었다. 칼빈은 복음전파와 더불어 난민들의 구제에도 혼신의 힘을 쏟았던 것이다.

 

우리는 칼빈으로부터 많은 것을 받았다. 하지만 정작 성경해석과 그 적용에 있어서 실패하고 있다. 이제라도 우리 한국교회가 신앙고백과 더불어 바른 성경해석을 통하여 실천적인 성도의 삶을 추구해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아름다운 교회의 삶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신앙과 삶을 병행함으로써 기독신자들이 있는 곳마다 그곳에 정의가 드러나고 긍휼이 베풀어지며 신의가 편만한 곳이 되기를 바란다. 이럴 때 우리 사회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