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척교회 6년차
< 박정희 목사, 죽전남포교회 >
“목사로 부름받은 확신 더 분명해”
동료 목회자들이나 주위에 아는 성도들이 “지금 교회가 몇 년 되었냐?”고 물으면 앞에 수식어를 붙여서 “개척한 지 6년 되었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이때 ‘개척한 지’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필자의 속내에는 교묘한 핑계와 자랑이 숨어 있음을 보게 된다.
핑계란 지금 교회의 연약한 형편에 대한 어쩔 수 없는 한계를 인정해달라는 것이고, 자랑이란 그렇게 짧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이루어 놓은 소위 목회적 성과에 대한 인정을 받고 싶은 욕망이 있음을 말한다.
핑계와 자랑, 자랑과 핑계가 늘 왔다 갔다 한다. 필자의 이러한 심리적 현상을 보다 못한 아들이 드디어 “아빠! 이제 개척교회라는 말을 좀 피해주세요”라고 말하기에 이르렀다. 얼마나 그 말을 달고 살았으면 아들까지 나섰겠나 하는 생각을 하니 정말 부끄럽기 짝이 없다.
결혼을 하면 물론 부부에 따라 기간이 틀리겠지만 3년 동안을 허니문 기간이라고 부른다. 하나님께서도 개척교회 3년은 허니문 기간으로 주시는 것 같다. 이 기간 동안에는 모든 것이 새롭다. 청춘남녀가 처음 결혼을 해서 매일 매일 사는 삶이 얼마나 새롭겠는가! 개척교회 역시 그렇다. 수가 적든 많든 그 교회가 세워지면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새로운 일들을 하게 된다.
새로운 일이란 다른 교회들이 하지 않는 특이한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교회들도 다 하는 일인데 새로 만난 사람들이 하기 때문에 새로운 일이 된다. 주방봉사, 교회청소, 심방 등 이런 일들은 모든 교회들이 다 하는 일이다. 그런데 개척교회는 이런 일들이 다 신기하고 새롭기만 하다. 지나놓고 보니까 “하나님께서 이런 허니문의 기쁨을 주어서 교회를 시작하게 하시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다. 부부생활도 허니문 다음이 문제다. 영어도 ‘헬로’라고 말한 다음이 어렵다고 하던데 마찬가지이다.
3년 정도 지나면 서서히 늘 하던 봉사가 조금씩 지겨워지고 급기야는 펑크도 낸다. 허니문 기간동안에는 걸리지 않았던 삶의 모습이나 행동들이 3년이 지나면서부터 걸리기 시작한다. 먼저 온 교인과 나중 온 교인들 사이에 삶의 외형, 즉 집이나 재산의 유무에 대한 비교에서 나오는 야릇한 감정들이 조금씩 쌓이기 시작하는 때도 3년 정도 지나서이다.
이런 저런 모임과 만남을 통해서 불쑥불쑥 튀어나오기도 하는 감정적 표현들이 생기는 때도 3년이 지나면서부터 시작된다. 목회자에 대한 실망을 본격적으로 갖기 시작하는 때도 이때부터가 아닌가 싶다. 예전에 목회학을 가르치시던 목사님께서 “가는 교인 잡지 말고 오는 교인 막지 말라”라는 잠언에 가까운 가르침이 실감나는 때가 바로 이때부터다.
그런데 참 희한한 것은 목회자로서 목회를 하고 있다는 느낌과 기쁨은 허니문 때보다 지금이 더 강하고 분명하다. 비로소 “목회를 하고 있구나” 하는 확인이 된다. 그렇다고 마음의 고통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아프고 쓰라리다. 신물이 나고 단내가 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뭔지 모를 기쁨이 있다는 것이다.
예전에 부교역자로 섬기던 교회의 담임목사님께서 교인들과 어려워져서 힘들어 하던 모습을 옆에서 본 적이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렇게 아파하는 담임목사님의 모습이 그렇게 위대해 보일 수가 없었다. 설교를 잘해서 성도들에게 칭송을 받을 때보다, 또는 교회가 어려운 난관에 부딪혀서 강한 카리스마로 기가 막힌 결단을 내릴 때보다도 더 위대해 보였다.
모세를 생각해 본다. 모세가 언제 위대하게 보일까? 모세의 사역가운데 가장 빛을 발하던 때가 언제일까? 홍해를 지팡이 하나로 갈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너게 할 때? 반석에서 물을 나게 할 때?
하지만 이것보다 모세가 더 위대해 보였던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 앞에 직면해 있을 때이다. 40년 내내 이런 모습 앞에 모세는 서있었다. 아마 이때가 모세로 하여금 가장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는 때였고, 자기가 은연중에 신뢰하고 있는 모든 근거들을 다 내려놓는 때였으리라.
학교로 말하면 초등학교 6학년 정도 밖에 안 되는 일천한 목회 경력이지만 이제 조금이나마 목회자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 확실하구나 하는 확인이 된 것 같아서 다행스럽고 감사하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 목회자로서의 단내 나는 기쁨을 확인하면서 이 길을 걸어가리라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