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는 얼굴
< 전정식 장로, 남포교회 >
“교회 안에서는 상대를 따지거나, 외모로 구분하는 일 없기를”
오늘은 새로 온 전공의가 첫 근무를 시작하는 날입니다. 늘 새로운 시작은 긴장과 함께 희망을 갖게 합니다. 오후 소아병동 회진 시간에 새로 온 닥터 박이 단정한 모습으로 뒤를 따릅니다.
저는 닥터 박의 첫 번째 회진 시간에 아기를 울리지 않고 진찰할 것을 보여줘야 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병실 첫 환자로 3개월 된 아기를 택하였습니다. 예상한대로 아기는 환한 웃음으로 진찰에 응했습니다. 힐긋 보니 닥터 박의 표정에 존경심과 부러움이 보였습니다.
아기들의 성장, 발달하는 모습을 볼 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아기들을 한없이 약한 존재로만 보며 아기들의 가지고 있는 능력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기가 일수입니다. 그런데 아기를 발달학적 관점에서 보면, 한 살 된 아기는 어른이 느끼는 감정을 다 느끼며 또 사회의 구성원이 될 준비를 다 갖추고 있습니다.
그런 사회학적 발달의 모습 중 제일 먼저 나타나는 것이 생후 3개월 때 보이는 ‘웃기 반응’ 모습(social smile)입니다. 이때는 아기가 누구를 보든지 무조건 웃습니다. 보이는 사람이 늘 보는 가족이 아니고 낯선 사람일지라도 웃습니다. 그래서 초보의사라도 3개월 된 아기를 울리지 않고 능숙하게 진찰할 수 있습니다.
하루 일과를 끝내고 집에 와서 편한 자세로 커피를 마시며, 거실 창밖에 보이는 산자락을 내다보다가 두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첫 번째는 아기가 사람을 보고 그 사람이 누구인가를 따지지 않고 웃는 모습이 우리의 본래 모습이라면, 성인이 돼서 사람을 만날 때 우리가 사람을 봐가면서 반기기도하고 외면하기도 하는 모습은 병적인 현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사회 생활을 하자면 때로는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는 사람도 만나기도 하니까 어떤 사람인지를 잘 따져보고 대하는 것이 어쩌면 합리적일 수가 있다고도 생각합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의 사람 만남이라면 달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교회 안에서는 상대를 따지지 않고, 외모로 구분하지 않고 오히려 약자이거나 갚을 수 없는 사람에게 더 큰 관심과 지지를 보여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두 번째는 “아기가 자라며 보이는 첫 번째 사회적 발달의 모습이 사람을 보고 웃는 것이라는 사실이 우연히 얻어지는 보통의 사건이 아니다. 어쩌면 인간은 창조 때부터 다른 사람을 만나면 웃게 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교회의 가르침에서 인류의 원죄, 인간의 전적인 타락 등에 관해 들었을 때, 삶 속에서 경험하는 제 속 안의 죄성을 미루어 보아, 사람의 본성이 선하지 않다는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기가 자라며 보이는 사회 발달의 모습 중 가장 처음 얻어지는 아기의 ‘웃기 반응’을 보면 애초에 사람은 선하게 창조되었다는 긍정적인 생각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애초에 선하게 창조되었다면, 삶에서 사람이 악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더라도 사람이 갖고 있는 죄성은 영지주의자 주장처럼 만드신 분의 잘못이 아니라 전적으로 인간의 잘못이라는 교회의 가르침에 믿음이 갑니다.
그러니 인간을 선하게 만드신 분이 악해진 인간을 보실 때 얼마나 안타까우시며 또 화가 나실까 하는 생각이 미치자 “참으로 사람이라는 존재란 하나님 앞에 면목이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우리를 아들이라고 하시며 아버지라 부르라고 하시는 하나님을 ‘참 고마우신 하나님’이라고 표현하는 것에 전적인 공감을 느낍니다.
장로이면서도 아직 교회 안에서 사람들을 만날 때 좋아하는 사람을 더 반겨하고 또 꺼려하는 사람이 있으며 때로는 미운 사람도 있다는 것을 보면, 저는 아직도 배울 것이 많고 고칠 것도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됩니다.
오늘 회진에서 만난 3개월 된 아기의 활짝 웃었던 모습은 저에게 가르침도 주고 부끄럼도 주었지만 또 큰 도전을 주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