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마디 말에 심어두신 그 크고 비밀한 일
추둘란 집사_수필가, 홍동밀알교회
“15년전 무심코 한 말이 기억 속에서 되살아나”
원고를 고치느라 국어사전을 한참 뒤적이다가 새삼 그 기억이 떠올라 싱긋
이 웃었습니다.
국어사전과 씨름하며 시간 보내
15년 전입니다. 대학원 건물 입구에 커다란 산수유나무가 있었습니다. 그 아
래에서 가까이 지내던 선배와 동기 두서너 명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
습니다.
“내가 번역을 하게 되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읽을 때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그러면서도 원작자의 뉘앙스는 그대로 살리는 그런 번역을 할 거에
요.”
평소에 번역가를 꿈꾸었다거나, 번역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거나, 그럴 만
한 공부를 하고 있어서 한 말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아마도 교재로 배우던
번역본 소설 이론서가 너무 어려워서 그런 말을 한 듯합니다. 지나가는 이야
기로 그야말로 무심결에 한 말이었습니다. 그런
데 내 말에 정색하며 대답하
는 선배 때문에 나는 머쓱해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거야 말로 최고의 번역이지. 그게 얼마나 어려운 건데 그렇게 쉽게 얘기
하냐? 우리말에 도통하듯이 영어와 그 문화에도 정통해야 그만한 수준이 될
수 있는 거야.”
선배의 말에는 약간의 비아냥거림이 묻어 있었습니다. 학부에서 국문학이나
영문학과는 전혀 다른 분야를 공부한 사람이 어쩌다 운 좋게 대학원 국문과
에 입학하게 되었다고 해서, 영어 해석을 좀 한다고 해서 언감생심 번역을
꿈꾸느냐는 어투였습니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대꾸할 말이 딱히 떠오르지 않
았습니다. 선배의 말이 다 맞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잊어버릴 만했습니다. 번역과는
전혀 관련 없는 분야에서 직장을 다니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며 15년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5년 전 참 희한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수필집 한 권
을 내고 나니 여기저기서 생활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
데 하루는 어느 출판사에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제법 손꼽히
는 출판사였는데 어린이책을 기획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파브르가 곤충에 대한 책을 여러 권 썼지만 말년에 식물에 대한 책도 썼습
니다. 다른 식물학 책과는 달리 아이들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듯이 책을
썼지요. 그 취지를 살려 우리 어린이들에게 이 책을 꼭 읽히고 싶습니다.”
그러면서 영어로 번역되어 있는 책 한 권을 내밀었습니다. 나는 되묻지 않
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저를 찾아오셨나요? 저는 번역하는 사람도 아니고 식물학 공부
를 제대로 한 사람도 아닌데…”
여러 번 사양하였으나 그이는 어렵지 않은 일이라며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습
니다. 전문 지식을 전달하기보다는 아이들이 읽기 쉽게 번역하면 된다고 매
달리다시피 말하였습니다. 원래 거절을 잘 못하는 나는 그만 얼떨결에 승낙
하고 말았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산수유나무 아래에서 내가 했던 말
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번역일이 시작되었습니다. 막상 일을 시작해보니 후회막급이었습니
다. 내용은 대학에서나 배울만한 식물형태학이었고, 분량도 방대하였습니
다. 더욱이 둘째를 임신하고 있었기에 집중하는 일이 몹시도 어려웠습니다.
몇 달 뒤에 출산을 하고
산후조리를 하고 모유수유를 하고, 정신없이 시간
은 흐르고, 제대로 번역을 했는지 퇴고할 여유도 없이 겨우 초고를 넘겼습니
다. 너무 지쳐서 더 이상은 손댈 수 없었습니다. 출판사에서는 원고를 받으
며 나름대로 고민을 해보겠노라고 한 다음 감감무소식이었습니다.
그리고 5년이 흘렀습니다. 그때 세상 밖으로 나오지도 않았던 둘째가 훌쩍
자라나 어린이집에 다니고 한글을 깨우쳐 책을 읽고 있습니다. 그사이 나는
그 번역 일에 대해서 완전히 포기했습니다. 계약금을 돌려달라고 하면 돌려
줄 생각까지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올해 성경공부 과정 중에 ‘홀로 있기’ 훈련 시간이 있었습니다.
두 시간 동안 볼거리, 들을거리, 읽을거리를 완전히 없애고 오로지 하나님
의 음성만 들어보는 훈련이었습니다. 나는 그 시간에 나를 향한 하나님의 1
년 계획과 10년 계획을 알게 되었습니다. 참 놀랍게도 그 안에 번역일이 포
함되어 있었습니다.
새로 용기가 솟아 출판사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런데 또 놀라운 일! 담당
자는 하루 이틀 뒤에 나에게 전화를 할 참이었다는 것입니다. 책에 나오는
식물에 대해 직접 자료를 찾고 채취하여
세밀화 기법으로 삽화를 그리는 데
에 그 5년을 썼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방대한 분량 가운데 어린이들에
게 필요한 부분만 추려 놓았으니 그것을 다시 매끄럽게 손보아 달라는 것이
었습니다.
그리하여 올 여름내 국어사전과 원고를 끼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한참 문장
을 고치다가 ‘아하!’ 하며 무릎을 쳤던 것입니다. 어느 순간 기억의 창고
한쪽이 열리며 산수유나무 아래에서 내가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나는 무심코 내뱉었을 뿐인데 하나님은 들으셨고 잊지 않고 이루어주셨습니
다. 아니, 아니, 어쩌면 그 반대였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이미 계획하셨
고, 그 ‘크고 비밀한 일’을 15년 전 그 순간에 내 입술에 미리 주셨는데
도 나는 미련하여 알아차리지도 못했던 것입니다. 입술로 내뱉는 한 마디가
이리도 소중한 줄, 나는 새삼스레 알았습니다.
익히 아는 낱말이라도 국어사전을 다시 뒤집니다. 아이들이 더 쉽게 읽을
수 있는 낱말을 찾고 찾으며 원고를 고칩니다. ‘아이들이 읽을 때 전혀 불
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그러면서도 원작자 파브르의 뉘앙스는 그대로 살리
는 그런 번역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n
어느 순간 기억의 창고 문 열려
하나님이 직접 내 입술 속에 심어두신 그 소망을 하나님과 함께 이루어 나가
는 나날이 행복하기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