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끄러운 기독교 (딤전 2:2b)
과거의 어느 시대를 뒤돌아보아도 요즘처럼 기독교가 시끄러웠던 때가 없었다. 각 교
회의 집회는 물론이고 기독교의 이름을 표방하는 매스컴과 심지어는 인터넷의 영상물까
지도 모두 기독교를 시끄럽게 만들고 있다.
교회마다 예배를 비롯하여 모든 집회가 소리를 크게 하기 위하여 오디오 시스템을 시설
함으로써 청각을 괴롭히더니, 이에 질세라 교인들은 시도 때도 없이 마구 소리를 지르
는 통성기도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고, 이제는 별별 악기를 모조리 대동시킨 가수들이
찬양인지 괴성인지 알 수 없는 소리로 귀를 소란스럽게 만든다. 예배는 물론이고 라디오
를 틀거나 텔레비전을 틀어도 기독교의 “기”자를 달고 있기만 하면 영락없이 소란스러
운 소리가 위세를 떨친다.
하다 못해 길거리에서 전도하는 청년들이나 지하철에서 구걸하는 사람들도 시끄러운 가
락에 맞춘 노래를 사용한다.
오늘날 기독교는 마치 이렇게 시끄럽고 소란스
러운 것이 기독교의 본질인 것처럼 자랑스
럽게 생각하며 장려하고 그렇게 하지 못하면 무엇인가 잘못된 것처럼 안타까워한다. 나
는 사람이 만들어낸 소리가 싫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기도에 힘을 쓰되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고 특히 왕과 관
리들을 위하여 기도할 것을 당부하였다.
사도 바울은 이런 기도가 신자들에게 중요한 유익을 가져다 준다고 믿었다. “이는 우리
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2b).
사도 바울이 왕과 관리를 위한 기도로 말미암아 생기는 유익으로 생각한 것은 신자들의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이었다. 이것은 참으로 깊이 살펴보아야 할 말이다.
사도 바울이 생각하는 신앙생활은 고요함과 평안함이었다. 고요함과 평안함은 내면적인
성격과 외면적인 성격을 가진다. 그것은 내면적으로는 마음의 평정과 안정을 나타내고
외면적으로는 소음과 괴성의 제거를 나타낸다.
어쨌든 고요함과 평안함은 부인할 수 없는 공통점을 가진다. 그것은 조용함이다. 내면적
으로나 외면적으로나 조용한 것을 가리켜 고요함과 평안함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생각한 신자의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은 종교생활과 사회생활에서
실현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신자는 내면적으로든지 외면적으로든지 맹목적으로 고요하
고 평안한 생활을 추구해서는 안된다. 신자의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은 경건함과 단정함
에서 실현되어야 한다. 경건함은 영적인 생활을 의미하며 (딤전 4:7),단정함은 사회적
인 생활을 의미한다 (딤전 3:4,8,11). 신자는 영적인 생활에서나 사회적인 생활에서나
조용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 신자의 조용한 모습은 이방종교와 세속사회에 큰 도전을 주
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살았던 당시의 이방종교는 무척 시끄럽고 세속사회는 매우 소란스러웠다는
것을 상기할 때 종교적인 삶에서나 사회적인 삶에서 신자의 이런 조용한 모습은 엄청난
도전을 주었을 것이다. 실제로 불신자들은 이런 신자들의 모습에서 낯설고 질 다른 모습
을 보았던 것이 틀림없다 (벧전 4:4).
사도 바울은 신자들이 종교생활과 사회생활에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기를 원했
다. 신앙생활에서는 경건함으로, 사회생활에서는 단정함으로 신자의 고요하고 평안한 모
습은 실현되어
야 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조용함은 신자의 기본적인 모습인 것이다. 물
론 이 말을 신자에게서 감동과 열정을 박탈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조용함과 열정은 결코 상치되는 것이 아니다. 소리 높여 설교하고 기도하고 찬양하는 것
은 감동적이고 열정적인 것이지만, 그 반대로 하는 것은 감동도 열정도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작은 소리의 설교에도, 묵상 중의 기도에도, 마음 속의 찬양에도 강풍의 타격같은 격정
과 불처럼 타오르는 뜨거움이 있을 수 있다. 우리는 한 번 시도해보아야 한다. 감동과
열정을 가지고 작은 소리의 설교를, 묵상 중의 기도를, 마음 속의 찬양을 할 수 있도
록.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사도 바울은 요즘 같은 시대에는 기도의 유익을 “우리가 … 시끄
럽고 소란스러운 생활을 하려 함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