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교육체계에서 얻는 교훈
김영규 목사·남포교회 협동목사
·뉴욕과학아카데미(NYAS),
·미국과학 진흥협회(AAAS),
·미국화학학회(ACS) 초청회원
“대학은 학문성에 의해 인정받는 것에서 그 생명력 확인해야”
유명한 스토아 학파 철학자인 제논의 아버지 므나세아는 그의 아들 제논을 위해서 지금은 전해내려 오지 않지만 많은 소크라테스의 저서들을 아테네의 상인들로부터 수집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기록된 파피루스들의 증거들에 의하면 지방의 유학생이 보낸 편지에서 알렉산드리아에서 자신의 선생을 계속 찾고 있다는 내용도 발견이 되고 있고, 책들을 수집하는 과정과 관련해서 다른 파피루스 증거에 따라 남이 소지하고 있는 책들을 직접 복사하는 경우도 확인이 되고 있다.
물론 나일강 상류의 지방도시라고 해서 꼭 작은 도시라는 것은 아니다. 그런 도시에서도 극장의 관람자가 11200명이 되는 경우도 있고 그런 지역의 어떤 마을의 경우 주민이 5천명 내지 6천명 정도이었던 것으로 사려해 볼 때, 어떤 시골의 유학생의 증거라기보다는 로마사회가 갖고 있는 넓은 문화교류 현상이 있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유대인 문헌에 따라 아직은 책들이 출판하는 과정과 관련하여 한 저자가 여러 기록자들 앞에서 구두로 부르고 동시에 기록하여 다량의 책들을 생산하는 그런 시대의 한계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고대 애굽사회에서의 전문 서기관들의 활동은 일찍부터 대단하여 조선시대 궁전에서 ‘실록’의 개념아래 이해되는 기록문화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기록문화들이 발달되어 있었음은 인정이 되어야 한다. 오늘날도 많이 남아 있는 법정 기록들의 경우 ‘속기록’의 개념을 도입할 수 있는 그런 증거들도 찾을 수 있다.
그러면서도 고대세계로 더 올라가면 갈수록 기록물 전래에 대한 정신이 투철하여 주전 2600년대 이전의 슈메르 슈르팍 잠언집은 거의 몇 백년 후의 사본들에서도 큰 변화가 없는 상태라는 사실이 확인되었고 고대 바벨로니아의 사본인 키쉬 찬양시의 경우, 뒤에 발굴되었지만, 그 보다 8세기 전 시대의 같은 문헌의 발굴에서도 그 본문들의 문법과 철자법에 있어서 조금 변화 외에 큰 변경 없이 보존되어 전해내려 온 것도 인류가 확인하게 되었다.
우리는 주전 3000년 내지 3300년대의 기록물들에서도 토판의 집이 증거 된다. 그런 토판의 집은 공공적인 혹은 사적인 문서들의 보관소의 기능만을 한 것이 아니고, 후대의 슈메르 문헌들 중 선생과 학생들의 대화체 문헌들에 따라 이해할 때 교육기관으로서 점점 더 발전하였음을 가정하게 된다. 그런 기능과 관련하여 주전 2600년대의 점토 문서들로부터 잘 증거되고 있는 기록자에 대한 명기는 아주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
고대 바벨로니아 시대의 기록물 점토들에서 잘 발달되어 확인이 되고 있는 내용은 토판의 마지막에 기록의 줄 수가 기록되어 있고 기록자의 명기뿐만 아니라 기록한 달과 날이 명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종종 기록물의 제목들도 기록되어 있다. 즉 그런 명기들은 그리스 로마 사회의 책들의 마지막에 남긴 책들의 총 줄 수에 대한 기록이 기록의 노동 값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교육기관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좀 더 일반적인 교육체계가 이어져 오고 있다.
고대 근동 사회의 많은 노동계약서들에서는 그렇게 크게 확증이 되고 있지는 않지만, 후대 주전 3세기로부터 증거되기 시작하는 헬라 파피루스들의 소위 파라모네(paramone) 노동계약서들 중에 전문 직업교육(didaskalike)계약서들에 따르면, 선생과 부모 사이에 혹은 선생과 보호자 사이에 혹은 선생과 학생 사이에 1년 혹은 그 이상의 기간의 계약에 따라 교육이 이루어지는 경우들이 그 예들이다. 그때 계약 내용에는 거꾸로 보호자 앞으로 맡긴 학생에 대한 노동 값도 지불하고 숙식도 보장하며 각 종 세금도 내주는 그런 내용들도 있다.
물론 선생과 학생 사이의 그런 계약에 따른 전문직업교육은 다양한 수공업자들, 의사들, 이발사들, 음악사들, 직조자들, 금속 공예사들, 제단사들의 교육 등 다양하였다. 따라서 고대 근동사회로부터 시작하여 헬라 로마사회에까지 계속되어 온 교육자와 피교육자 사이에 계약에 따른 전문교육체계는 그렇게 오래되었다고 할 수 있다.
현대 대학교육 발전에 있어서 볼로냐 대학이 세속 직업교육들에 있어서 학생들이 교수들에게 급료를 지불하면서 관원들에게 인증을 받았던 학교로서 그런 긴 역사를 잇고 있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신학교육이 중심이 되었던 파리대학의 경우, 교수들의 급료가 교회로부터 지불되었기 때문에, 학생들 사이에 폭력사건이나 폭동이 발생하였을 때 교회와 관원사이에 갈등으로 인하여, 오히려 사회적 문제들이 더 크게 야기되었다.
대표적 예로 1229년과 1231년 사이에 파리대학에서 일어난 학생 난동사건과 학생들 피살 및 폐교 상황으로 발전된 예가 그 경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큰 문제가 된 사건으로 인하여 대학이 1231년에 처음 교회와 관원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졸업자들이 어디에서나 가르칠 수 있는 인증서(ius ubique docendi)를 수여할 수 있는 권위를 갖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학의 독립성은 높은 학문성에 의해서 학생과 사회 및 국가로부터 인정을 받는데 그 생명이 있다. 대학은 직업인들을 기르기 전에 인류가 마지막 풀지 못한 문제들을 풀기 위해서 씨름하는 어떤 장이 있는 곳으로 모든 이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권리가 있다.
거기에는 지연이나 학연 혹은 정치적 계파들이 끼어 들 수 있는 자리가 없는 가장 높은 창조성만을 필요로 하고 그런 창조적 인재들을 길러내는데 유일한 목표가 있는 곳이다.
대학에 들어오기 쉬운 관료주의와 기업논리 및 이념사상들이 더 대학을 파괴하고 있다. 학문의 높은 호기심이 있는 곳에 대학은 있어야 하고 그런 자율성이 국가로부터 보호가 되며 감시와 재정 등 모든 면에서 지원을 받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