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단상| ‘좁은 목회? 넓은 사역?’_변재웅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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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목회? 넓은 사역?’

 

< 변재웅 목사, 송내중앙교회 >

 

맡기신 말씀대로 성령 의지하여 전하는 사역을 좁다라고 평가할 수 없어

목회의 폭 넓힌다는 명분 아래 성공 신화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일 없어야

 

 

교회나 목회자에 대해서 ‘좁아’라고 평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쉽게 말해 목회 사역이 좁다는 뜻입니다. 또는 설교 내용이 좁다는 얘기입니다. 이미 넓은 것이 선이고 좁은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다는 전제가 작용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좁다’고 평가하는 태도에는 머뭇거림이 없습니다. 애매한 자세로 ‘좁다’는 단정을 내리지는 않습니다. 명쾌하고 단호한 그만큼 자신의 평가를 확신한다는 뜻이고, 자신의 ‘넓은’ 목회 사역에 대한 확신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좁다’는 진단을 받는 입장에서는 실제로 별 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몇 가지 점에서 생각해 볼 이유는 충분히 있습니다.

 

아이들이 다투다가 한 쪽에서 ‘니 팔뚝 굵다’는 식으로 나오면, 그 동안 각자 내세우던 내용은 사라져 버리고 자존심 대결만 남으면서 더 큰 소리를 치는 쪽으로 판세가 기웁니다. 목회 현장에서의 ‘좁아!’ 이 한마디 판단도 그런 역할을 합니다. 사역의 내용은 온 데 간 데 없고, ‘좁아서 안 된다’는 평가만 남게 됩니다. 그리고 ‘좁다’고 지적하는 소리의 메아리만 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맡기신 말씀을 통해서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며 하나님 나라인 교회를 세워 가십니다. 어디서든지 사람에게 맡기신 그 말씀이 전해지는 곳이라면 성령을 통해서 죄 사함과 구원을 얻는 믿음을 허락하시기에 목회 사역이 끊이지 않고 전개되고 있습니다.

 

적은 사람이 모이든 많은 사람이 모이든, 말씀이 전해지는 곳에 성령께서 역사하시고 그로 인해 믿음이 생성되고 자라가는 방식은 인간이 고안(考案)해 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대로 제공해 주시는 은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회 사역은 그 본질적 특성상 사람의 입장이나 세상의 관점에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은혜를 ‘넓은 관점’이나 ‘좁은 관점’에서 바라볼 수도 없고, 더더욱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목회의 본질과 신학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한 이해는 낄 틈이 없게 만들어 놓고서 ‘좁다’는 평가를 내리는 것은, 아이들끼리 싸우다가 ‘니 팔뚝 굵다’ 즉 ‘너 잘 났다’ 하는 식과 다를 게 없습니다. 자기들만 옳은 채 하니까 좁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말이니까요!

 

교회가 세워져 가는 과정은 초월적인 영역에 속해 있습니다. 회심과 거듭남의 역사는 사람의 손안에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생명에 속한 것은 머리카락 하나라도 사람에게 허락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죄 사함과 의롭다 함을 입는 것과 관련해서는 죄인인 당사자에게는 아무런 권한도 없을뿐더러 어떤 역할도 수행할 수 없습니다. 절대적으로 무능력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회는 의외로 단순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맡겨주신 말씀에 대한 자세와 태도만이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목회의 생명은 말씀에 있는데, 그 말씀을 전하는 내용과 그에 따른 목회 사역을 진단 평가하는 기준으로 ‘넓고 좁음’이라는 잣대가 대두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말씀을 맡기신 대로 우리가 그 말씀을 전할 때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믿음을 갖게 하시고, 나아가 그리스도를 찾게 만드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맡기신 말씀대로 성령에 의지하여 전하는 사역’을 좁다고 평가하는 자체가 성립될 리 없습니다. 더군다나 목회 사역의 옳고 그름을 ‘좁다, 넓다’는 기준으로 평가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좀 더 직접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면, ‘넓고 좁음’의 기준 자체에 대한 논의를 피해 갈 수 없습니다. 어디서 온 잣대냐는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좁다’는 평가를 내릴 때 망설이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의 관점을 확신한다는 말이고, 그렇다면 넓고 좁음을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기준이 없이는 구체적인 평가를 내릴 수 없을 테고, 그만큼 자신할 수도 없을 테니까요!

 

‘좁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는 기준의 출처가 어디일까요? 짐작하건대 외적으로 드러나는 열매, 곧 교인 수와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교회의 외적 규모’와 ‘사역의 넓고 좁음’의 상관관계가 당연시되는 현실을 감안할 때 그렇습니다.

 

‘좁다’는 비판은, 어떤 신학 체계를 고집하고 어떤 지도자만을 붙들고 있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교회 성장이 지체되고 급기야는 교회가 침체에 빠져 무너져 간다는 것입니다. 교회 침체의 원인을 ‘좁은 목회 방침’과 ‘설교의 좁은 관점’에서 찾는데, 그 원인의 근본은 신학에 집착하고 특정 지도자를 추종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좁다’는 평가가 현실적으로 성립되고 존재하는 이유는, ‘성공 사례’가 위력을 발휘하기 때문입니다. 소위 ‘넓게’ 목회하니까 교인수의 양적 성장이 이루어지고, 교회가 커진 만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는 ‘논리’가 성립됩니다. 한 마디로 성공 사례의 위력 때문입니다. 그래서 ‘좁다’는 진단을 내리는 주체의 입장은 단호하고 그 태도가 분명합니다. 한 치의 의구심이나 의문이 개입될 여지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한층 더 ‘좁으냐? 넓으냐?’라는 기준을 가지고 목회 현장을 바라보고, 또 교회를 평가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여기서 얻어지는 결론은, 교회를 세우는 목회 사역을 인간의 단순 논리로 평정해 버리고 일축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넓고 좁다는 잣대 하나만으로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일거에 휩쓸어버릴 수 있다는 것인지, 그 의도나 취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힘들고 끝없이 인내가 요구되는 목회 현장에서 배부른 소리를 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괜히 내용도 없는 기준으로 목회 사역의 정당성 시비를 걸고 나오는 이런 쓸데없는 ‘논리 장난’이 목회를 더 힘들게 하고 더 헛갈리게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은 것입니다.

 

말씀을 아는 일에, 그래서 말씀대로 전하는 일에 늘 ‘내 코가 석자’라는 입장으로 다가가는데, 이 자체도 늘 긴장되고 무거운 압박감을 견디기 쉽지 않은데, 내용도 기준도 동기도 애매모호한 문제까지 업고 갈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사람이 말씀을 전하고 가르칠 때 성령께서 유효한 역사를 일으키심으로 말씀을 전해 듣는 사람이 자신의 죄인 됨을 통렬히 깨닫고 그리스도를 찾고 구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 중심’의 구원 사역입니다. 그런데 넓고 좁음을 따지는 목적과 그 기준을 적용하는 의도는 ‘사람 중심’에서 비롯된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하나님 중심’과 ‘사람 중심’이 어울려 교차점을 갖고 공감대를 형성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서로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원초적인 질문으로 논지를 밝히겠습니다. 말씀을 넓게 적용시켜 전하면 그만큼 성령의 유효한 역사가 더 일어납니까? 반대로 말씀을 좁게 적용시켜 가르치면 그만큼 성령의 역사는 제한되는 것입니까? 이렇게 질문을 제시해 놓고 보면, 이 논의를 마무리할 수 있는 단서가 잡힙니다.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무의미한 질문에 불과합니다. ‘말씀을 넓게 적용시킨다? 좁게 적용한다?’, 이런 사람의 논리가 성경에 근거한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찌 됐든 목회 사역의 폭을 넓히면, 그만큼 전도의 폭도 넓어지고 열매도 풍성해진다는 입장이 대세인 듯싶습니다. 목회의 폭을 넓힌다는 것이 말씀과는 어떤 관계인지를 해결하지 않은 채로, 성공 신화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형국입니다.

 

사람이 된다고 하면 되는 곳이 하나님 나라는 아닙니다. 말씀과 상관없이 목회의 폭을 넓혀가는 것은 그 사람의 나라는 될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될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 맡긴 말씀인 ‘기록된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도록 하나님께서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사람이 많이 모이는 넓은 곳에서도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고 사람이 적은 좁은 곳에서도 말씀은 매이지 아니한다는 신앙고백으로, 이 애매모호한 논리를 정리하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말씀의 역사’가 관건입니다. 감사하게도 이런 명제적 진술에 덧붙일 내용이 주어져 있습니다. ‘말씀은 매이지 않는다’(딤후 2:9)는 것입니다.

 

말씀의 역사가 열쇠인데 그 말씀이 매일리가 없다면, 오직 믿음으로 기도하는 길로만 나서면 되지 않겠습니까! 물론 그 한 걸음 한 걸음도 성령의 돌보심만을 의지 하면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