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
<정요석 목사 _ 세움교회>
현실의 한계 속에서 더욱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능력에 기대야
이문열은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란 소설에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아래처럼 차곡차곡 담아냈습니다. “스러져 가야 할 것이기에 더 아름다운”, “사라진 모든 것의 추억처럼 희미한 빛”, “몰락하는 영광이 가지는 비장미”, “현란하여 몽롱한 유년과 구름처럼 허망히 흘러가 버린 젊은 날의 꿈 속으로 돌아갈 수 없으므로” 그는 “진정으로 사랑했던 고향에로의 통로는 오직 기억으로만 존재할 뿐, 이 세상의 지도로는 돌아갈 수 없다.”라는 문장으로 책을 끝맺습니다.
그런데 이문열은 이 제목과 기본 내용을 토마스 울프의 <You can’t go home again>이란 소설 작품에서 빌려왔습니다. 주인공 죠지는 십여 년 만에 고향을 방문하였는데 고향은 이미 도시화와 산업화로 파괴되었고, 인간성은 상실되었습니다. 도시와 다를 바 없이 돈, 권력, 욕망에 찌든 또 하나의 도시였습니다. 뿌리 뽑힌 자들의 고독과 방황이 우울하게 그려진 이 소설도 “진정으로 돌아갈 곳은 기억 속에만 존재할 뿐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기다리는 것은 없다”라고 끝맺습니다.
그런데 울프는 자신의 소설을 죤 밀턴이 1667년에 발표한 <실락원>에서 영감 받았습니다. 밀턴은 이 작품에서 사탄에게 유혹당한 인간의 범죄와 그로 인한 에덴동산에서의 추방으로 인간은 더 이상 그들의 영원한 고향인 에덴동산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밀턴은 물리적 고향이 아니라, 인간의 실존이란 면에서 고향을 말했습니다. 어찌하여 사람이 고향을 잃어버렸는지 그리고 그곳에 다시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반역하며 죄를 지었을 때 에덴동산은 폐쇄되었고, 인간은 쫓겨나 방황하고 유리하게 되었습니다. 쫓겨난 인간은 그 후 나름대로 에덴동산을 만들어 보려고 여러 시도를 했지만, 친형 가인이 친아우 아벨을 죽이는 살인이 벌어졌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영적 죽음은 이렇게 실제적인 살인으로 이어졌습니다.
아벨을 죽인 가인은 성(도시)을 만들었습니다. 가인의 후손들은 육축 치는 조상이 되었고, 수금과 퉁소를 잡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들었고, 도시를 만들고, 바벨탑을 쌓기도 했습니다. 그에 따라 정치, 경제, 법, 문화, 과학기술도 자연히 발달되었겠지요. 그런데 이러한 노력이 진정한 고향을 가져다줍니까? 달에 사람을 보내고 인간의 유전자를 분석하는 시대가 되었지만, 우주 어디에도 고향은 없었고, 인간 유전자 어디에도 거룩함을 관장하는 곳은 없었습니다.
21세기에 이르러도 부의 편재는 심화되고, 아프리카에서는 여전히 많은 이들이 굶어죽고, 기업들의 경제 전쟁과 국가 간의 전쟁은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의학의 발달은 사람의 수명을 다소 연장했는지 모르지만 인간다운 수명은 오히려 줄어들어 노인의 고독과 소외는 더 심해져 많은 자살로 이어졌습니다. UN의 역할은 21세기에 이르러 그 한계를 여지없이 드러내며 세계의 분쟁지의 갈등을 중재하지 못했습니다. 스마트폰은 널리 보급되었지만 사람들 간의 소통은 더욱 줄어들었습니다. 집은 넓어졌고 뛰어나 건축 자재로 산뜻해졌지만 행복과 평안이 깃드는 것은 아닙니다. 석사와 박사가 널렸지만 지혜와 통찰이 보편화되었는지요?
성경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연관되어 사용된 동사들은 “임하다”, “들어가다”, “오다”, “이어 받다”, “내려오다” 등입니다. 이들 동사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은혜로 초월적으로 주어짐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임하고, 왔을 때에 우리가 하는 일은 “들어가다”, “이어 받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들이 넓히거나 확장하거나 이룰 수 없고, 하나님이 주셔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주실 때에 우리가 그 가치를 알고 들어가야 하고 이어 받아야 합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를 어찌 알고 들어가겠습니까? 이것마저도 하나님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로 하게 하십니다. 이것마저도 은혜인 것입니다.
진정한 고향은 사람의 힘으로 넓히거나 확장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십니다. 비참한 현실의 한계와 사람의 별 수 없음을 볼 때마다 우리는 더욱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능력에 기대야 합니다. 우리는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