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민해설 42 > 원죄(2) – 부패한 본성과 그것에서 비롯된 활동들의 죄의 성질 <제6장 5항>_김병훈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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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죄(2) – 부패한 본성과 그것에서 비롯된 활동들의 죄의 성질 <제6장 5항>

 

< 김병훈 목사, 합신 조직신학 교수 >

 

6장 5항: “본성이 이러한 부패는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중생한 사람들에게 남아 있다. 그리고 비록 그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고 억제되어 있다하더라도, 부패한 본성 자체와 그것에서 비롯되는 모든 활동들은 진실로 그리고 합당하게 죄이다.”

 

중생한 사람일지라도 본성의 부패를 가지고 있어서 그로 인하여 나타나는 모든 활동과 그 원인인 본성 자체가 곧 ‘죄’임을 고백해야”

 

“천주교는 원죄로 인한 결과를 단지 원초적 의의 상실로 보는데 이것은 원죄로 인한 타락한 본성의 윤리적 악의 성질을 고려하지 않은 잘못된 주장”

 

본 항은 아담이 범한 죄로 인하여 후손에게 미쳐진 죄의 오염의 상태, 곧 본성의 부패와 관련하여 두 가지 사실을 교훈합니다.

 

하나는 중생한 사람일지라도 본성의 부패를 여전히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며, 다른 하나는 그로 인하여 나타나는 모든 활동과 그것의 원인인 본성 자체가 모두 죄라는 사실입니다. 전자는 소위 ‘완전주의 성화론’을 부정하며, 후자는 천주교회의 ‘사욕(邪慾, concupiscentia)’론을 부정합니다.

 

1. 여전히 본성의 부패 상태에 있는 사람들

 

먼저 본 항과 관련하여 주목할 사실은 중생한 사람들에게도 본성의 부패함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새 생명의 원리를 마음에 받은 사람은 이제 하나님을 사랑하며 거룩함을 좇는 영혼의 성향을 갖게 됩니다. 이러한 은혜를 가리켜 중생이라 합니다.

 

이러한 은혜는 성령님을 말미암는 것이며, 그 은혜를 입은 자는 돌 같은 마음이 제하여지고 살처럼 부드러워지며 새로운 의지로 하나님의 거룩과 선하심을 바라게 됩니다(엡 2:1-5; 고전 2:10-12; 겔 1:19; 36:27 등 참조). 하지만 부패한 본성이 중생한 사람에게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사실은 성경을 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6-17)는 말씀에서 보듯이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의 심령 안에는 성령을 따르고자 하는 중생의 은혜와 이를 거슬려 육체의 욕심을 따르고자 하는 본성이 서로 대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로 인하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영적 전투를 위한 경건의 노력이 명령으로 주어집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 이러한 싸움의 끝은 언제일까요? 본 항은 이러한 부패한 본성의 흔적이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계속하여 남아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완전주의 성화론에 대한 분명한 반대를 뜻합니다. 이들은 신자가 죄 없이 이 세상을 살며 율법을 온전히 지켜 무죄한 상태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신앙고백서는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의 싸움이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있을 것을 말함으로써 이들의 주장을 배격합니다.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의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은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일 1:8), 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에서 바로 확인이 됩니다. 이러한 영적 실존은 다윗(시 32:5), 솔로몬(왕상 8:46), 이사야(64:6), 베드로(마 26:70,72,74), 바울(롬 7:14) 등의 생활과 증언을 통해 더욱 확인이 됩니다.

 

흔히 의로운 자로 성경에서 언급이 되는 노아(창 6:9), 욥(욥 1:1), 아사(왕상 15:14) 등은 결코 일평생 완전한 자로 살았음을 증거하기 위한 본보기가 아닙니다. 성경이 때때로 신자들을 거룩한 자로 부르지만(고전 2:6; 엡 5:27 참조)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따라 이루어지는 은혜를 객관적으로 드러내며 일컫는 말이지, 신자들이 온전하며 죄가 전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2. 죄는 본성 자체로부터 오는 모든 것

 

본 항은 중생한 사람에게 여전히 부패한 본성이 남아 있음을 말함과 동시에, 두 번째로 이렇게 남아 있는 본성의 부패함이 어떠한 성질의 것인지에 대해 말합니다.

 

중생한 사람에게 남아 있는 부패성은 당연히 중생하기 이전에 있던 본성이 발휘하던 부패의 영향력에 비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약화된 것이며 억제되어 있고, 또한 용서를 받은 것입니다.

 

어떤 신자라도 자신이 죄를 범하지 않는다고 하면 스스로를 속이며 진리를 떠난 자이로되(요일 1:8), 그가 만일 자신의 죄를 자백하면 그리스도께서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그의 죄를 사하시며 그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입니다(요일 1:9).

 

복음이 주는 이러한 약속은 부패한 본성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억제되어 있으며, 성령을 좇아 행하는 자는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과 능력이 주어짐을 교훈합니다(요일 3:8).

 

중생한 사람에게 남아 있는 부패한 본성의 성질과 관련하여 본 항이 말하는 중요한 요점은 그것에서 비롯되어 나오는 활동들과 함께 죄라는 사실을 지목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천주교회의 신학에 대한 반대를 나타냅니다.

 

천주교회는 아담이 타락한 이후에 후손들에게 미쳐진 부패한 본성의 사실을 인정을 합니다. 그러나 그 본성의 부패성을 죄로 인정하지 않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천주교회는 한편으로는 아담의 타락으로 인한 영향력이 본성의 부패를 가져왔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 부패성이 완전히, 전적으로 타락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을 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405항에서 말하기를 “원초적 거룩함과 의로움은 잃었지만, 인간 본성이 온전히 타락한 것은 아니다”고 합니다. 그 결과 “인간 본성이 그 본연의 힘에 손상을 입고 무지와 고통과 죽음의 세력에 휘둘리며 죄에 기운다”고 가르칩니다.

 

원죄로 인한 이러한 죄의 경향성, 곧 사욕(邪慾; concupiscentia)으로 인하여 타락한 이후의 인간은 “죽음의 지배력을 지닌 존재, 곧 ’악마‘의 권세에 예속하게” 되었음을 강조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407항).

 

이러한 천주교회의 주장은 언뜻 보면 개혁교회의 것과 유사해 보입니다. 그러나 천주교회의 고백은 앞서 살펴본 4항에서 “우리는 선을 행하고자 하는 성향을 전혀 갖지 않으며, 선을 행할 수도 없고, 선을 반대하는 자들이 되었으며, 그리고 악을 행하고 싶은 마음으로 온통 이끌려져 있다”고 고백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교훈과는 미묘하게 차이가 납니다.

 

3. 천주교의 잘못된 주장을 반박함

 

우선 천주교회는 사람이 본성의 부패로 말미암아 마귀에 예속되고, 죽음의 세력에 휘둘리며 죄에 기울어지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타락 후에도 타락 이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자유로운 상태임을 전제합니다. 왜냐하면 타락으로 인하여 나타난 영향은 원초적 의와 거룩함(iustitia et sanctitas originales)의 상실로 보기 때문입니다.

 

좀 더 설명을 하면, 천주교회는 본래 하나님께서 창조한 자연적 인간은 육체와 영혼의 갈등이 있는 상태인데, 영혼의 영적 지배력에 육체가 조화롭게 놓일 수 있기 위하여서는 외적인 도움이 필요했다고 믿습니다.

 

이 외적인 도움이 바로 하나님께서 자연의 상태에 덧붙여 주시는 초자연적인 ‘부가된 은사’(donum superadditum)입니다. 그런데 타락으로 인하여 이 부가된 은사를 상실하게 되었고, 그 결과로 이러한 원초적 의로 인하여 누리던 조화가 파괴되는 결과를 겪게 되었습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400항).

 

그렇지만 본래 누리던 자유로운 상태는 여전합니다. 비록 원초적 의를 상실하여, 육체가 영혼의 지배력을 벗어나며, 악을 선택하는 경향성 아래 지배를 받고 있지만 선을 선택할 능력이 상실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407; 1732항)

 

그럴 때, 천주교회는 영혼의 지배력을 벗어나고자 육체와 영혼의 조화를 깨려는 부패한 본성인 사욕(邪慾; concupiscentia)을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원죄로 인한 결과를 단지 원초적 의의 상실로만 볼 뿐이며, 원죄로 인한 결과로 나타나는 타락한 본성의 윤리적 악의 성질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단지 어쩔 수 없는 자연적인 것(insuperabilis)으로 여깁니다(트렌트 공의회, 제 5회기, ‘원죄에 대한 교령’ 제 1조 참조).

 

그러나 이에 대하여 신앙고백서는 “부패한 본성 자체와 그것에서 비롯되는 모든 활동들은 진실로 그리고 합당하게 죄”라는 사실을 확고히 강조합니다. 사욕(邪慾; concupiscentia)이 진실한 의미에서 죄의 본질에 합당한 완전한 죄임을 선언합니다.

 

천주교회의 변명에 따라 본성의 부패성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사실이 사욕을 죄가 아니게끔 하지 않습니다. 율법에 순종을 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이 율법의 불순종을 죄가 아니게끔 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율법에 어긋나는 것은 죄라고 말하며(롬 7:7 “…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또한 탐내지 말라는 계명에 대한 불순종으로 드러나는 탐심은 자신의 속에 있는 죄가 만들어낸 것이라고(롬 7:8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고 고백을 합니다.

 

요컨대 율법에 대한 불순종의 행위인 탐심이나 그것을 초래하는 부패한 본성의 욕망이나 모두가 적절한 의미에서 죄라고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은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이라고 교훈합니다. 성령과 대조가 되는 육체의 소욕은 이미 그것으로 죄가 됨을 바르게 보여줍니다.

 

마치는 말

 

혹 어떤 이가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을 들어, 욕심 곧 마음의 부패는 죄를 낳는 원인이지만 그것이 죄 자체는 아니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열매가 말해 주듯이 나타난 결과가 죄인 것은 그것을 낳은 것이 바로 같은 성질을 지닌 죄인 것임을 말해 주는 법입니다.

 

악한 결과는 원인의 악함을 말하며, 그 결과 악의 행동은 그 행동을 낳은 소욕의 악함을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주신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된다’는 교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다’는 경계, 그리고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마 15:18)는 강론 등은 외적인 행동의 악과 내면의 부패성을 포괄하여 모두 죄로 정죄하십니다.

 

본 항에서 “부패한 본성 자체와 그것에서 비롯되는 모든 활동들은 진실로 그리고 합당하게 죄이다”라고 고백하는 바는 성경의 교훈을 참되게 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