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참된 정치 일꾼을 고대하며

0
187

사설

참된 정치 일꾼을 고대하며

 

  ‘꾼’이란 말은 그 분야의 능숙한 전문가를 뜻한다. 맡은 일을 전문적으로 잘하는 사람이 일꾼이다. 그런데 꾼은 사기꾼, 모략꾼 등 부정적으로도 사용된다. 특히 정치꾼이라 하면 왠지 권모술수, 협잡에 능한 사람이 떠오른다. 우리는 자신의 영달을 위해 정치를 활용하는 정치꾼이 아닌 섬김과 봉사에 능한 전문가로서의 정치 일꾼을 고대한다.

  정치 일꾼은 누구를 위하는가? 우문이지만 국민을 위해 섬기고 봉사한다. 헌법 제7조는 “공무원은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고 한다. 이는 국가의 일꾼은 일부(특권층, 특정 지역, 특정 그룹)를 위한 자가 아님을 강조한다. 또 일꾼의 정체성은 국민을 위한 ‘봉사자’이며 반드시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그 점에서 지난 정권의 몰락은 이 기본에서 이탈했기 때문임을 금방 알 수 있다. 섬김이 없는 군림, 무책임한 자세는 국민의 신뢰를 잃고 나라를 병들게 한다. 그런 자들은 이미 참 일꾼이 아니다.

  목민심서를 쓴 다산 정약용은 아들 학연에게 주는 편지에서 벼슬살이에 대해 이렇게 이른다. “임금을 섬기려면 임금의 존경을 받아야지 그의 총애를 받는 사람이 됨이 중요치 않다. 또 임금의 신뢰를 받음이 중요하지 그를 기쁘게 해 주는 사람이 됨이 중요치 않다.” 참된 일꾼이 되려면 인기와 복지부동에 길들여진 관리가 되지 말라는 것. 요즘 말로 적용하면 섬김의 대상인 국민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는 일꾼이 되고 포퓰리즘에만 의지하는 자세를 멀리하라는 뜻이다.

  지방 선거를 치르며 더욱 간절한 것은 참 좋은 정치 일꾼을 만나는 일이다. 독일의 안톤 시나크가 쓴 낯익은 수필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을 보면 “대의원들의 강연집을 읽을 때” 슬프다고 했다. 이 흥미로운 대목을 다시 풀면 선거에서 후보들의 유세를 들을 때 대부분 공약을 남발하며 레토릭만 그럴싸할 뿐 별 실천성과 결실이 없어 슬프다는 것이다. 우리는 차제에 기독교인들은 물론 국민 모두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는 그리스도인 정치 일꾼들이 많이 배출되기를 고대한다. 이를 위해선 적어도 두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는 이기주의와 자기 합리화를 버려야 한다. 우리는 기독교만을 위한 정치꾼을 바라는 게 아니다. 교회에 물리적 유익이 된다고 성경적 사회정의와 시민법을 무시하는 이기적 자기 합리화를 피해야 한다. 강남의 모교회가 신축하며 도로 지하를 점유하는 일로 물의를 일으킨 것이 그 예이다. 1770년대 미국 버지니아의 목사 폰테인은 “노예제도가 기독교 정신에 위배되지 않는가?”라는 동생의 질문에 이렇게 답장했다.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사 온다는 것은 확실히 범죄나 다름없어. 그러나 버지니아에서 노예 없이 사는 건 거의 불가능해. 만일 스스로 나무 베고 호미질 할 만큼 건강하지 않으면 굶어 죽기 딱 좋아.” 그런데 남부에서는 경제가 기울어 노예를 먹여 살리기마저 어려운 불이익을 당하자 비로소 노예제도 무용론이 대두되었다. 이기적 자기 합리화의 씁쓸한 전형이다.

  지역 이기주의의 대표적 현상인 님비(NIMBY)와 핌피(PIMFY)의 경우도 그렇다. 2000년도에 대법원은 장애아 학교가 혐오 시설이 아니라고 판결했다. 그럼에도 최근 서울 강서구의 장애아 학교 설립을 결사반대하는 주민들에게 장애아 엄마들이 무릎을 꿇고 허락해 달라 애원하는 사건이 생겼다. 서울 강남구 밀알학교 설립 당시도 떠올려 보라. 그 결사반대 주민들 속에 우리 그리스도인은 없었을까?

  둘째는 우리 스스로가 성경적 윤리 의식과 시민 정신에 투철한 참다운 국민이 돼야 한다. 투표로 뽑는 참된 일꾼이란 완벽한 사람이라기보다 성경적 가치에 근접하는 정책을 이끄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 앙겔라 메르켈’의 저자 폴커 레징은 “교회는 정치인들에게 경건함을 요구하기보다는 그의 정책의 내용이 기독교적 가치와 일치하는가를 질문해야 한다.”고 했다. 정치인의 경건함을 무시하는 게 아니다. 그가 소개하는 메르켈 총리는 신앙고백 위에서 정치를 하면서도 신앙을 수단으로 삼지 않고 가치적 바탕으로 삼으려 애쓰는 정치 일꾼이다. 국가의 번영도 안전도 중요하지만 오늘 우리가 고대하는 일꾼은 단지 마키아벨리즘적 카리스마를 지닌 지도자가 아니다. 시작과 과정과 결과에 이르기까지 도덕률을 준수하고 더욱이 기독교적 가치를 지향하는 정책을 펴려고 국민들을 섬김으로 봉사하는 일꾼이다.

  따라서 교회는 국가나 지방의 정책이 성경적 원리에 가깝도록 돕고 감시하고 선도해야 할 책임이 있다. 알려진 일화이지만 1899년 3월1일 ‘대한그리스도인회보’에는 서울의 유력자가 지방 원님으로 부임하는데 그 고을이 예수교 마을이어서 예수교 없는 다른 마을로 옮겨 달라고 했다는 기사가 났다. 기자는 “만약 새 고을 원님이 무단히 백성의 재물을 빼앗을 지경이면 그것을 용이하게 뺏기지 않을 터이니 이 원님이 예수 믿는 사람이 있는 고을에 가지 않은 것이 이 까닭인 듯하다.”라고 썼다.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가렴주구가 안 통하는 정의로운 나라. 이 정도면 정치 일꾼들이 교회를 존중하고 신뢰하지 않겠는가. 그러려면 우리는 그들을 선도하는 순기능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 신뢰와 존경을 받는 그리스도인 정치 일꾼을 고대한다. 아울러 모두가 그런 일꾼을 배출하고 선도하는 참된 국민인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