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서와 야곱의 만남 (1844년) | 프란체스코 아예츠 Francesco Hayez (1791~1882), 캔버스에 유화, 300x208cm, 이탈리아 브레시아 시(市), 토시오 마르티넨고 미술관 소장
그림으로 나누는 묵상
나를 비워 상대를 감화시키는 화해
< 금빛내렴 박사|미학자 >
“이 극적 화해의 순간은 진정어린 사과와 따뜻한 관용의 마음이 빚어낸 합작품이다”
“갈등과 다툼을 그치고 서로 가지고 있던 나쁜 감정을 풂.” ‘화해’의 뜻풀이이다. 어떻게 화해를 이룰까. 배려 없는 접근은 외려 반감을 야기할 수 있다. 철저히 준비된 화해의 제스처가 필요하다. 야곱의 예에서 배울 수 있을 것이다. 한 마디로, 내게 있는 것을 나누고 비워 상대의 마음을 채우기. 이것이 야곱이 취한 화해의 방식이다. 그가 형 에서를 만날 준비를 어떻게 하는지 보자(창 32장). 화해의 메시지 전달자 보내기, 상황개선을 위해 말과 물질로 거듭 선의를 표하기, 그리고 사이사이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기. 그런 다음 상대에게 진정성을 보인다. 야곱은 가족들보다 “맨 앞으로 나가서 형에게로 가까이 가면서” 무려 “일곱 번이나 땅에 엎드려 절을 하였다.”(창 33:3)
에서 편에서도 생각해보자. 남의 뒤꿈치를 잡고 속여 넘기는 야곱을 용서할 수 없었을 터. 원통함과 괘씸함이 가시지 않는 과거의 상처, 그건 언젠가 어떤 식으로든 해소돼야 할 트라우마였을 것이다. 그런데 아우가 느닷없이 사람을 보내 연락을 취해오다니. 혹시 또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닐까. 그래도 한 번 만나볼 일. 만약을 기해 부하들을 데려가는 참이다. 그런데 거듭거듭 마주치는 무리들이 야곱의 선의를 표출하고 있지 않은가. 마침내 저 멀리 아우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연방 무릎을 꿇어 자신을 낮추며 다가오고 있다. 단지 물질적 성의뿐 아니라 진정성을 한껏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진실함은 원한을 녹인다. 이에 그는 아우에게로 달려간다. “두 팔을 벌려, 야곱의 목을 끌어안고서, 입을 맞추”는 에서.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둘은 함께 울었다.”(창33:4)
이극적 화해의 순간은 진정어린 사과와 따뜻한 관용의 마음이 빚어낸 합작품이다. 그림 속 장면은 형제가 서로 얼싸안고 함께 울다가 이제 막 에서가 고개를 들어 야곱의 뒤에 있는 이들을 보고 질문을 던지는 순간을 담고 있다. “네가 데리고 온 이 사람들은 누구냐?” 그제서야 야곱은 아내들과 자식들을 소개하고 그들은 차례로 에서에게 절을 하며 인사를 하려는 참이다(창 33:4~5).
19세기 이탈리아의 화가 프란체스코 아예츠가 이 주제를 섬세하게 포착하였다. 그의 그림은 이전 시대의 그림들처럼 장엄하거나 화려하지 않다. 단순 명료한 신고전주의의 기법을 구사하면서도 개인 감성을 전체 색채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레 드러내는 낭만주의의 경향을 함께 지니고 있다. 그는 인물들을 세밀히 묘사하며 각각이 지닌 감정의 미세한 변화를 잡아내고, 관람자는 그 분위기에 동참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의 삶 속에서 화해가 쉽지 않은 것은 왜일까. 각자의 처지에서 야곱의 자세와 에서의 태도가 조화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돌아보건대, 거듭 잘못을 시인하고 무릎을 꿇기까지 참회를 표명했던 개인과 국가가 있었던 반면, 사과의 말이 상대의 귀에 닿기도 전에 또 다른 망언으로 상처를 덧내는 나라와 집단도 있다. 다른 사람과 나라 얘기할 게 못된다. 지속적으로 나를 살피며 우리 모두의 궁극적인 화해를 위해 애쓰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평화”이며,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며,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 된 것을 없애시”는 그분이 도울 것이다(엡 2:14).
* 편집자 주 – 위의 글은 2017년 8월 5일자 국민일보의 ‘금빛내렴의 성화 묵상’ 칼럼을 기초로 본보 독자와 공유코자 필자의 수정 원고를 받아 재게재한다.
* 금빛내렴 박사/ 홍익대학원 철학, 미학자. 홍익대 강사. 기독인문학연구원 연구위원. 현재 여러 대학과 교육기관 및 교회 등에서 미학, 예술철학, 미술사, 디자인 및 인터넷 문화 관련 강의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