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교회의 12월은 따뜻한가?
12월이면 구세군과 여타의 자선활동들이 사랑의 온도계를 작동시킨다. 우리 개혁교회는 온도를 얼마나 높이고 있는가? 개혁교회일수록 이웃을 섬기는 따뜻한 구제와 사회봉사에 풍성하기를 바란다. 근자에 영화화된 서서평 선교사의 감동 깊은 일화도 있지만 사람들이 기독교를 가장 친근히 여길 때는 소외된 자들이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주고 병들 때 고쳐 주는 그 순간일 것이다.
기독교회의 구제와 사회봉사는 구약적 배경은 물론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하고 야고보서의 믿음과 행함의 일치에 대한 역설(약2:14-17)로 보강되어 초대교회의 구제 활동의 모범을 통해 정립이 되었다. 초대교회 때는 매우 구체적인 구제가 시행되었다. 특히 집사직이 나타난 발단은 과부들에 대한 보호 및 빈민 구제의 일을 맡기기 위함이었다. 야고보서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1:27).”고 했다. 세속이란 무엇인가? 하나님나라의 본래적 가치에 반하는 세상의 가치관이다. 세상의 가치에 물들지 말라는 것은 전 영역에 걸친 권고이다. 그것은 물질에 대한 집착과 탐욕에 관해서도 동일하다.
초대교회는 ‘가난한 자들’이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경제적으로 힘든 자들이 많았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당연히 구제하는 교회였다. 그런데 교회가 세력을 얻고 국가가 확립되자 이런 구제 활동을 국가에 위임해 버렸다. 그 결과 교회 내의 구제 사업은 감소하고 국가 재산의 7-8할이 교회에 귀속되어 그 재정이 증가했음에도 교회는 오히려 타락의 길을 걸었다. 구제는 마침내 자기 의를 드러내려는 바리새인적 허세가 돼 버렸다. 그래서 아씨시의 프란시스의 경우처럼 청빈을 실천하는 간헐적 노력 외에는 중세는 캄캄했던 것이다.
그러다 종교개혁이 일어나 빈자를 돌보기 위한 집사직이 회복되면서 교회의 재정 집행은 다시 빈자 구제를 원칙으로 하게 되었다. 이는 교회 안에서만 아니라 교회 밖으로 확대 진행되었다. 루터교는 빈자 구제만을 목표로 따로 모금함을 만들었고 산모, 병자 보호와 교육 문제에까지도 관심을 기울였다. 칼빈도 빈민 구제를 사도적 의무로 책정했다. 칼빈의 종교개혁 직후 제네바에 일반 병원과 함께 구빈원이 설립되었다. 1541년의 법령에는 시가 고용한 의사들은 병원을 돌볼 뿐 아니라 다른 가난한 자들을 돕도록 규정해 놓았다.
제네바대학 경제학자 앙드레 비엘러에 의하면 칼빈과 그의 동역자들은 매우 검소하게 살았고 심지어 그들의 생활은 궁핍에 가까웠다고 한다. 이는 중세적 금욕주의와는 다른 물질에 대한 개혁교회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각성에 기인한다. 그런 중에도 그들은 구빈에 관심을 기울여 물품이나 기부금을 거두려고 애썼는데 1545년 프로방스의 신도들이 대량학살 당한 후 칼빈은 스스로 연맹을 조직하여 피난민들이 가득한 복도를 비집고 다니며 기부금을 얻어냈다고 한다.
칼빈은 디모데전서 설교(6:17-19)에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그 이웃을 위해 헌신하기를 바라신다.”고 했다. 또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주님은 우리가 각자의 재력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궁핍한 자들을 도울 수 있도록 우리에게 이 자연의 균형을 권고하시므로 풍요로운 자도 있을 수 없으며 부족한 자도 있을 수 없다”(고후 8:13주석).
그러므로 하나님나라의 가치관을 따르는 개혁교회는 그 사회의 경제정책에도 관심을 두고 정당한 분배가 이루어지도록 힘써야 한다. 생존권을 보장하는 분배가 창조질서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교회의 구제 활동은 성도들을 돕는 데서부터 지역사회로 확대되어야 한다. 구조적으로 늘 가난할 수밖에 없고 장애인이라서 영세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 대해 교회 곧 신자들은 일정 부분 책임을 져야 한다. 그것이 주님께서 물질을 주시는 목적이다. 누구든 나보다 가난한 자를 돌볼 책임을 느껴야 한다.
한국교회도 간헐적으로 선심 쓰듯하는 구제가 아니라 계획과 예산의 대책을 세워 지속적으로 행하는 구제를 지향해야 한다. 한 해가 저무는 12월, 성탄절이 다가온다. 우리만의 구원론을 또 다시 다지고 기뻐하기만 하는 절기일 것인가? 개혁교회는 주님 오실 때까지 항상 있을 가난한 자들, 약한 자들, 소외된 자들을 위한 가시적 구제와 봉사에도 힘써야 한다. 액수나 규모가 얼마가 됐든, 부득불 표나게 하든 조용히 하든 우리들의 교회는 이웃을 위해 사랑을 나누어야 한다. 지금까지 잘해 왔다면 좋은 일이다. 더 많이 그렇게 하도록 하자. 그래서 다시 묻는다. 개혁교회의 12월은 따뜻한가? 아니, 고쳐서 묻는다. 개혁교회의 열두 달은 따뜻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