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 (112)
친 구 요한삼서 1:13-14
< 정창균 목사, 합신 총장, 남포교회 협동목사 >
신학과 신앙생활의 철저함은
타인과 정들어가는 것을 방해하거나 금하지 않는다
대학 졸업하고 군에 갔다 온 다음 해, 나는 남서울교회 지하실에 막 둥지를 튼 합동신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시골에서 올라온 터라 아는 이도 없고, 신학이란 아무 것도 몰라서 끼일 자리도 없었습니다. 한 학기 내내 앞자리 앉아 강의만 듣고 말없이 그렇게 학교를 오갔습니다.
여름 방학 끝나고 2학기가 지나가고 있는데, 어느 날 왠 덩치 우람하고 얼굴 새까만 한 반 학생이 옆에 다가왔습니다. 말을 걸어주고, 이것저것 궁금해 하고, 이리저리 끼어주고… 그렇게 가까운 사이가 되고 맘을 나누는 친구가 되어갔습니다. 그 친구가 대학 때 부터 가까운 또 다른 친구가 있어서 우리는 자연히 셋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35년. 그 세월 동안 우린 함께 먹고 함께 자고 함께 쏘다니는 세월이 쌓여갔습니다. 그러다보니 때론 신학적 안목이 달라도, 취향이 달라도, 입맛이 달라도, 생각이 달라도, 서울 목사로 가고 지방 목회자로 가고 교수로 가면서 사는 바닥이 서로 달라도, 의견과 주장하는 바가 때론 달라도, 그것이 친하게 함께 놀며 지내는데 문제가 되지 않고 장애도 되지 않았습니다. 뭐라고 해도 이해가 되고, 나 같았으면 하지 않을 생각과 행동을 해도 그냥 이해가 되고 용납이 되는 데까지 함께 왔습니다. 우리는 서로 깊은 정이 든 것입니다.
나이 들어갈수록, 정든 사람이 있어야 살맛이 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린 서로를 정든 사람이라고 여겨줍니다. 아내들도 그렇게 여기며 함께 먹고 즐거워합니다. 우린 늙어갈수록 이 아까운 세월을 아끼는 맘으로 기회가 없으면 만들면서라도 자주 만나고 싶어 합니다. 나는 친구들의 그 따뜻한 맘결과 배려 때문에 행복합니다.
안병욱, 김형석, 김태길. 앞의 두 분은 대중 사상 강연으로, 마지막 분은 글로 한 시대 한국 대중에게 큰 영향을 끼친 분들입니다. 나는 고등학생 때부터 이 분들의 강연을 쫓아다니며 들었습니다. 김형석 교수가 최근 98세가 되어 하신 강의를 들었습니다.
젊을 때는 일을 열심히 하느라 셋이 자주 만나지 못했는데 떠날 날이 가까워 오니 이제 자주 만나자는 제안을 안 교수님이 해왔다는 것입니다. 김형석 교수님은 좋은 생각이다 싶어 일 년에 네 번씩을 만나자고 일정을 정하여 김태길 교수님께 연락했습니다.
반응은 의외였습니다. 떠날 날이 얼마 안 남았는데 이제야 자꾸 만나면 떠나는 사람은 괜찮지만 남는 사람은 정든 마음 상처를 어떻게 하라고 그러느냐고, 마지막 혼자 남을 사람의 마음을 생각해봤냐고 나무라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남는 사람 맘 아플 것 생각하여 늘그막에 정드는 일 하지 말자는 김태길 교수님의 말을 들으니 그렇겠다 싶어 일 년 네 번 만나는 계획을 없던 일도 하였습니다. 얼마 안 있어 김 교수님 떠나고,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다른 한분 떠나 이제 자기 혼자만 남았단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만나고 싶은 마음 간절한데도 혼자 남을 사람 맘 아플 것을 생각하여 그것을 참으며 만나지 않겠단 것은 이미 깊은 정이 든 마음일 테지요.
우리 셋은 새파란 청년 때부터 정들기 시작하여 그 정이 무르익고 깊어지고 농익어서 이제는 누가 세상을 떠나 헤어져도 그간 누린 정이 있어서 괜찮을 듯싶은 그런 사이가 되었습니다. 나이 이만큼 살아 보니, 사람은 업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란 걸 알겠습니다. 해놓은 일 되씹는 보람만으로는 사람이 살기에 부족합니다. 사람은 돈이 많으면 살 수 있는 게 아니란 걸 살아보니 알겠습니다. 돈만 있으면 외로움도 잊을 수 있는 건 늙어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옆에 정든 사람이 있어야 사는 법이란 걸 알아갑니다. 목적이 같으니, 사상이 같으니, 경제 수준이 비슷하니, 아파트 넓은 평수가 같고, 신학 사상이 같고, 목회하는 교회 규모가 비슷하니… 그런 건 조건이 아닙니다.
내 아버지는 왜정 때 소학교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우리가 늘 준모 아저씨라 부르는 어른과 친하게 지냈습니다. 준모 아저씨는 대학교 출신입니다. 그분은 그 시절 도청의 높은 분이어서 늘 검은 색 “찌푸차”를 타셨습니다. 나중엔 그 지역 선거관리를 책임지는 분이었습니다. 그분이 우리 아버지를 종종 찾아오셨습니다. 두 분이 다소곳이 앉아서 담소를 하셨습니다.
제 아버지는 그분께 “예수 믿고 교회 다녀” 하고 권하시곤 했습니다. 한번은 그분이 아버지께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내가 도청에 있을 때 차를 타고 나가면 직원들이 늘 나한테 절을 했는데, 도청 떠나고 보니 그 사람들은 나한테 절을 한 게 아니더라고. 내 차한테 절을 했어.” 높은 자리 떠나니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는 사람들에게 느끼는 서운함이었을 것입니다. 아주 어릴 때 들었는데 지금도 그 말씀을 하시던 준모 아저씨 모습이 생생합니다.
말년의 사도 요한은 “사랑하는 가이오,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를 생각하며 편지를 쓰다가 붓을 내던지듯이 이렇게 말하며 편지쓰기를 멈춥니다. “내가 네게 쓸 것이 많으나 먹과 붓으로 쓰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속히 보기를 바라노니 우리가 대면하여 말하리라.” 사도의 말이 내게는 이렇게 들립니다. “편지 몇 줄 쓰는 것 가지고는 양이 차지 않는다. 너의 얼굴을 보고 싶다.” 사도 바울은 임종을 코앞에 두고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의 마지막을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너는 겨울 전에 어서 오라”(딤후 4:21). 사도의 이 말 역시 보고 싶다는 말로 들립니다. 정든 두 사람의 아름다운 모습이 선하게 떠오릅니다.
사람은 나이 들어갈수록, 정든 사람이 있어야 살맛이 나는 법입니다. 신학의 엄격함이나 신앙생활의 철저함은 다른 사람과 정들어가는 것을 결코 방해하거나 금하지 않습니다. 어느 선배 목사님의 지론처럼, 우리가 같은 신학의 울타리 안에 있고, 같은 교단의 울타리 안에 있다면 우리는 서로 정이 들어가야 합니다. 만나는 것이 반가워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