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가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섬김”
< 박상봉 교수_합신, 역사신학 >
이신칭의 ‘교리’의 유익을 얻는 데서 나아가 믿음의 자유를 가진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과 죄에 맞서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을 위해 헌신하는 삶이 중요
이웃을 섬기는 선행은 ‘이신칭의’의 실천적인 은사이며 열매
루터가 말하는 이웃사랑은 의롭게 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목적 속에서 자유롭게 행하는 것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지극히 자유로운 주인이며, 아무에게도 종속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일을 위하여 봉사하는 지극히 충성스러운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종속된다.”
1520년 11월에 출판된 루터의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이신칭의에 대한 인간론적이고, 실천적인 서술이다. 루터는 ‘성경이 말하는 합리적인 근거’를 가지고 어거스틴과 펠라기안 논쟁 이래로 등장한 행위구원을 붙들고 있는 로마 카톨릭 교회를 비판하면서 ‘이신칭의’의 정당성과 그것의 실천적 의미가 무엇인가를 알려준다. 특별히, 이러한 이해 속에서 우리는 결론적으로 루터가 말하는 기독교 윤리의 핵심적인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루터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쓸 당시 상황은 로마 교황청의 압박 속에서 삶의 긴장감이 최고조에 이를 때였다. 1520년 6월 15일에 교황의 파문위협교서인 “주여 일어나소서(Exsurge Domine)”가 공포되었을 때, 그의 심리적인 압박은 극에 달했다. 루터는 오직 성경과 자신의 양심에 근거하여 종교개혁을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소명으로 받아들이고 교황주의자들에 대항하는 영적인 전쟁에 돌입해야만 했다. 결국, 루터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신학자들과 논쟁 속에서 교황제도가 적그리스도적인 권력의 상징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확신할 수 있었다. 교황제도를 위해 견고한 체계를 이루고 있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교리적인 허상도 직시했다.
비록 작센(Sachsen)의 귀족 출신이자 교황의 시종인 칼 폰 밀티츠(Karl von Miltitz)의 간곡한 중재 속에서 로마 교황청과 화해할 수도 있는 일말의 기대감 속에서 쓰여진 것이라고 해도, 루터의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근본적으로 로마 카톨릭 교회와 투쟁 속에서 성경에 근거한 참된 신앙의 본질을 규명한 글이다. 성경에 대한 깊은 이해와 믿음을 통해 주어지는 진정한 자유와 섬김이 무엇인가를 알게 한다: 먼저, 이 자유는 믿음 안에서 인간을 얽매고 있는 모든 것들을 벗어버리는 ‘영적인 자유’이다.
죄, 사망, 저주, 지옥, 행위, 율법 등으로부터 자유를 누리는 것이며, 또한 고난, 박해, 죽음 등을 이겨내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정죄할 수 없으며, 심지어 스스로 짓는 죄도 이 자유를 빼앗지 못한다. 이와 동시에, 이 자유는 믿음을 통해 자유롭게 된 그리스도인이 결코 자신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위해 사용하는 ‘섬김’으로 귀결된다.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 이르게 된 그리스도인이 이 믿음의 충만함과 풍성함 속에서 사랑과 기쁨을 통해 지극히 자유롭게 이웃을 섬기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 속에서 루터는 교황주의에 대항하여 종교개혁의 존폐가 달린 신앙의 싸움을 기꺼이 수행했다. 그리고 새롭게 세워진 교회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당시의 모든 종교적인 억압으로부터 진정으로 자유할 수 있는 ‘이신칭의’의 구원을 알려주기 위해 목숨을 건 신앙의 걸음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루터는 하나님 앞에서 성경의 가르침과 신앙의 양심에 근거하여 자신 앞에 놓인 사명을 감당한 것이다. 큰 위협과 두려움 속에서도 믿음이 주는 진정한 자유와 섬김을 확신하며 자신의 책임을 외면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삶의 자태는 루터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통해서 확인시켜 주는 ‘이신칭의의 실천적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 믿음에 대한 바른 지식은 근본적으로 성경에 기초되어 있지만, 동시에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와 관련하여 루터의 종교개혁 사상에 기대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영적인 현실은 루터가 목숨을 건 투쟁을 통해서 세상에 밝힌 이신칭의 같은 종교개혁의 중요한 원리를 담고 있는 ‘교리’에 대한 유익을 얻는 데만 관심이 있어 보인다. 그 대신에 믿음의 자유를 가진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과 죄에 맞서 치열하게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을 위해 헌신하는 삶에 대해서는 주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신칭의를 통해 자유를 누리고 있지만 그 믿음을 이웃에게 증거는 하지 않고, 이웃사랑을 통해 배려를 받고 있지만 그 사랑을 이웃에게 베풀지 않으며,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내세의 소망을 확신하고 있지만 그 소망을 가지고 모험적인 삶은 살지 못한다.
특별히, 루터는 그리스도인이 어떤 위협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기꺼이 이웃을 섬기며 살 수 있는 이유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에 두고 있다. 비록 구속주와 죄인의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두 인격적인 존재가 영적으로 ‘신랑과 신부’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인격을 가진 분(참 하나님과 참 사람)이 믿음이라는 반지 때문에 신부의 죄, 죽음 그리고 지옥에 참여하시고, 이것들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신다. 그리고 이것들이 마치 자신의 것인 것처럼 또 자신이 죄를 지으신 것처럼 행동하셨다. … 그러므로 믿는 영혼은 그의 신랑이신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의 보증을 통해 모든 죄악으로부터 자유하게 되며, 죽음으로부터 안전하게 되고, 지옥으로부터 보호를 받게 된다. 왜냐하면 믿는 영혼에게는 신랑되신 그리스도의 영원한 의, 생명 그리고 구원이 선물로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의 죄와 그분의 의를 교환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연합은 이신칭의가 단순히 교리에 대한 지적인 동의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어떤 것으로도 끊을 수 없는 인격적인 관계에 대한 의미도 담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라는 존재를 위해 고난 받으시고, 죽으셨으며, 부활하신 것이다. 이 사실을 ‘내’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칭의’가 발생하는데, 즉 이러한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나’ 사이의 인격적인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
그래서 ‘나’의 ‘죄, 사망 그리고 형벌’은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 되고, 그분의 의, 생명과 구원은 ‘나’의 것이 된다. ‘나’의 죄책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지워지고, 그분의 의가 ‘나’에게 전가되는 것이다. 더욱이, 신랑인 예수 그리스도와 신부인 우리가 연합했다는 사실은 그분과 우리가 서로의 마음을 공유한다는 것도 포함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연약한 마음을 잘 아시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빌 2:5)’을 잘 알게 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그분은 우리를 도우시고, 긍휼이 여시기며, 우리의 억울함을 신원하여 주신다(살전 4:6).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겸손함으로 남을 낫게 여기고, 이웃의 일을 돌아보며, 이웃에게 유익을 주기 위해 살아간다(빌 2:1-11).
구원의 조건으로써 이웃을 섬기는 것이 아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랑과 기쁨 안에서 자발적으로 섬기는 것이다. 감사를 받든 비난을 받든, 이익이 되든 손해가 되든 아무런 상관없이 섬긴다. 친구와 원수를 구별하지도 않는다. 당연히, 우리의 의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베푸신 은사와 성령의 역사를 통해 자유롭게 섬기는 종으로서 행하는 것이다. 결국, 이웃을 섬기는 선행은 ‘이신칭의’의 실천적인 은사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의롭게 될 때, 우리는 성령을 소유하고, 이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선을 행할 수 있도록 돕고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좋은 열매를 맺는 좋은 나무처럼, 선행은 그리스도인의 이신칭의의 열매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앞서의 모든 논의에 근거하여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기독교를 윤리적 종교가 아닌 믿음의 종교로 규정하고 있음을 인식할 수 있다. 아담의 타락 아래서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이 주신 계명 중에 어느 것 하나도 바르게 지킬 수 있는 능력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전제했기 때문이다. 기독교를 믿음의 종교라고 할 때 강조점은 인간의 행위에 의해 구원을 얻을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여김을 받는다는데 놓여있다: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당신은 다른 사람이 될 것이다. 당신의 모든 죄를 용서 받고, 당신은 타자(他者)의 공로로, 즉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로 의롭다함을 얻게 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루터는 한편으로 기독교를 윤리 없이 구원을 이룰 수 있는 종교로 이해한 것이다. ‘믿음’만 있으면 칭의를 위해 어떤 인간적인 행위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루터는 ‘이웃사랑’이 없는 믿음을 거짓된 것으로 인식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자신의 이웃을 위해 산다. 그렇지 않을 때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믿음과 사랑은 분리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을 통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로 끌어올려지고, 사랑을 통해 이웃에게로 내려간다. 칭의를 제공하는 믿음은 이웃을 섬기는 사랑을 그 열매로 드러낸다. 당연히, 루터가 말하는 이웃사랑은 의롭게 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목적 속에서 자유롭게 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나에게 내어주신 것처럼 나 자신을 나의 이웃에게 마치 하나의 (작은) 그리스도처럼 내어 줄 것이다. 이 세상에서 살 때, 내 이웃에게 필요하고, 유익이 되며, 도움이 되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행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루터는 다른 한편으로 윤리 없는 기독교를 말하지 않는다는 것도 확인된다. 이웃을 섬기는 사랑이 구원을 이룰 수는 없지만, 그러나 이 사랑은 이미 칭의를 얻는 그리스도인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종합적으로, 루터는 ‘어떤 선한 행위를 하기 위해서는 이미 앞서 선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명제 속에서 기독교 윤리를 존재론적으로 이해했다. 즉,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미 의롭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합당하게 살아간다는 것을 선명히 밝힌 것이다. 그래서 루터의 다음과 같은 외침은 너무도 자연스럽다.
“그리스도인은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미 의롭다 함을 얻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위해 모든 일을 기꺼이 기쁨으로 행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