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려, 공동체의 꿈
우리 시대엔 인성 교육이나 지도력을 말할 때 흔히 배려라는 덕을 거론하곤 한다. 사회가 소통의 부재로 공동체적인 미덕을 잃어가고 부익부 빈익빈 같은 편중 현상이 극에 달한 때문일 것이다. 그에 따른 사회적 손실도 늘면서 배려라는 덕목이 국가나 사회, 가정 등에서의 관계 향상과 지도력에서 중요한 자질로 떠올랐다.
배려는 사전적으로는 도와주거나 보살펴 주려고 마음을 쓴다는 뜻이다. 이는 서로에 대한 신뢰를 기초로 상대의 입장에서 한 번 더 이해하고 존중해 주는 소통의 마음이다. 쉽게 말해 상대의 필요에 민감해져서 그에게 진정한 도움을 주려는 마음과 행동을 뜻한다.
누구나 도움을 주고받으며 사는 것이 세상의 상식인데도 그동안 우리 사회의 각박함은 서로에 대한 배려심을 졸아붙게 하는 극단적 이기주의의 조류를 생성해 왔 다. 이것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사회주의권의 퇴조는 그 이념과는 달리 인간을 물질적인 존재로만 상정하고 상관된 문제를 풀어 가려는 삭막함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약자를 위한다며 출발했으나 약자를 오히려 억압하는 소수 강자들만의 편향된 통치와 이기심이 자기 몰락을 초래한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도 심각하다. 자본주의 자체가 인간의 건전한 개인주의를 경제적으로 적용한 체제이다 보니 불건전한 이기주의로 치달으면 결국 문제를 일으킨다. 사회가 상호 투쟁적인 약육강식의 생존 질서로 변질되어 특히 약자에 대한 배려의 윤리가 바르게 시행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조금만 더 약한 자들을 섬세하게 이해하고 배려하며 산다면 진정한 소통으로 서로가 그 필요를 채워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사회가 서로의 슬픔과 상처를 치유하는 사회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일의 모본을 보여야 한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는 말씀도 배려의 정신에 다름 아니다.
혹자는 얘기한다. “약자가 무슨 선이라도 되는가?” 아니다. 약자를 배려한다는 것은 약자가 선해서가 아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자가 도덕적으로 선하다고 판단하여 도움을 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생래적 존엄함을 지닌 인간이 강도를 만나 곤궁에 처했기 때문에 그 존엄성을 지켜 하나님의 형상됨을 회복시켜 주려 함이다. 그렇게 함이 선한 일이요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신 이웃을 사랑하는 방식이다. 그것은 복음 전도는 물론이요 구체적 위로와 도움을 주는 일까지 포함한다.
그래서 배려의 변용인 똘레랑스(tolerance)로 서로 관용하고 인정하며,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로 힘 있는 자가 사회의 약자를 위해 더 섬기는 모습을 보인다면 서로가 돕고 사는 공동체의 형성이 꿈만은 아닐 것이다. 주님은 우리를 배려하여 죄에서 건지시려고 낮아지셔서 고난의 길을 가신 것 아닌가. 은혜를 많이 누리고 사는 우리도 주님의 마음으로 이 사연 많은 나라와 사회와 교회를 품고 그 길로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