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현필 목사, 부천중동교회 청년부 담당 >
“혹, 동성애자들의 입장이 정치 세력화하여 어떤 입법적 절차를 밟게 된다 하더라도 동성애라는 행위 자체를 태생적으로 혐오하는 사람들이 역차별 받지 아니할 권리와 인권 또한 보장되어야”
지난 6월 7일 서울 서대문구 연세로에서는 동성애자들의 행사인 제15회 ‘퀴어문화축제 퍼레이드’가 ‘사랑은 혐오보다 강하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역대 최대 규모로 열렸다.
퀴어(queer)라는 용어는 원래 ‘이상한’, ‘기묘한’이라는 뜻으로, 동성애자들을 비하하는 의미로 사용된 용어였으나, 동성애자들 스스로가 ‘그래 나 이상하다 어쩔래?’ 하는 뉘앙스로 사회적인 통념에 대한 저항적 의미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규정하기 위해 차용된 용어이다.
이들 동성애자들이(그들은 ‘성소수자’라고 부르기를 좋아한다) ‘퀴어 퍼레이드’를 하는 벌이는 이유는 이렇게 사회적으로 ‘이상한 사람들’ 취급 받는 그들의 스스로의 자긍심을 축하하고, 지지하며, 사회적으로는 자신들이 자유와 평등을 염원하는 건전한 의식을 가진 사람들임을 알리기 위한 목적도 있다.
그런데 이날 퍼레이드는 동성애를 반대하는 보수 기독교 단체와 어버이 연합, 일부 시민들이 퍼레이드 진행을 가로막으면서 3시간 넘게 행사가 지연되었다. 퍼레이드를 벌이던 참가자들은 행사를 방해하는 기독교인들을 향해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가스펠을 부르며 동성애 혐오를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한 시민은 “나는 어느 쪽도 아니지만, 기독교가 저렇게까지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반대야 할 수 있지만 저렇게 퍼레이드를 막고 난동을 부리는 것은 심하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고 한다. 이를 두고 SNS 상에서도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한 트위터리안은 “퀴어 축제 가서 퀴어가 된다면, 교회 맨날 가는 너네는 왜 예수가 되질 못하니?”라는 조소를 날리기도 했다. 특히 일부 진보적인 기독교인들은 “강자에겐 관대하고 약자에겐 야멸찬 한국 기독교”, “기독교계가 엉뚱한 곳에 집단행동을 벌이고 있다” 등의 신랄한 비판도 쏟아냈다.
동성애를 반대하는 보수 기독교인들의 주장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언론과 누리꾼들의 반응들을 종합해 볼 때 동성애를 반대하는 그들의 표현 방식은 국민 대다수의 공감대를 끌어내지 못했을 뿐 아니라, 결과적으로 지혜롭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사실 그 동안 한국 교회는 전체적으로는 동성애가 성경적 관점에서 명백한 죄라는 인식 그 이상의 단계, 즉 단순한 정죄의 시선이 아닌 공감적 대화와 변화를 끌어내기 위한 대응논리까지는 그 고민이 발전되어 오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그들을 맞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런 와중에 지난 해 뜨거운 논쟁을 불러 일으켰던 차별금지법은 한국 교회의 발등에 떨어진 불처럼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 동성애자들이 각계각층에 진출하며 인권이라는 명분으로 사회적 인지도를 높여온 것에 비하면 한국 교회의 인식과 대처는 지극히 미미했다. 특히 이번 대회를 통해 보듯이 동성애자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고품격 문화축제로 포장했지만, 한국 교회는 언론의 눈에 그저 ‘행패’ 혹은 ‘난동’ 수준으로 비춰지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옳은 것을 지혜로운 방법으로 표현하지 못하면 자칫 문제를 제기한 교회가 문화적으로 미개한 집단이 되거나 틀린 것이 되고 마는 분위기가 이미 우리 사회에 형성되어 있다.
그렇다면 크리스천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는 동성애 문제를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하는가? 목회자의 입장에서 이 문제를 좀 더 진지하게 고민하기 위한 첫 번째 단초로서 몇 가지 사항을 점검해 보고자 한다.
1. 큰 틀에서 볼 때 동성애자들이 인정받기를 요구하는 인권은 옹호되는 것이 마땅하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이므로 그러한 요구는 당연히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하는 인권의 범주에 동성애라는 행위가 포함되어야 하는가 하는 점에서는 동의할 수 없다.
2. 진정한 인권이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 문제에 있어서 그 사회에서 관습적으로 용인되어 온 통념과 상식을 명문화한 성문법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 한, 동성애자들은 민주 시민사회의 일원으로서 자신들의 입장을 밝힐 수 있지만 그 표현의 자유가 인정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을 반대하는 교회의 입장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3. 자신의 동성애적 성향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며 힘들어하는 일부 동성애자들(크리스천들이 다수 포함된)의 고충이 동성애 행위 자체에 대한 기독교의 정죄에 의해 무시되어서는 안 되지만, 그들의 고충이 그 사회 공동체 전체가 함께 나누고 공감되어져야 할 부분이라는 측면에서 그들의 고충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4. 그러나 반대로 동성애 행위 자체를 억지 성경 해석으로 합리화하거나, 성경적 의미의 결혼관 자체를 사회학적으로 재정의하려는 시도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다. 특히 이번 퀴어퍼레이드를 준비해 온 조직위원회의 행사 취지가 사랑을 ‘남녀’ 간의 감정으로 정의한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 개정에 반대 의사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라면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5. 설혹 동성애자들의 인권이 정치적으로 정당화되고, 그 사회적 인지도나 입지가 강화되어 동성애라는 행위 자체를 표현의 자유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그것을 도덕적으로 판단하고 정죄하는 보수 기독교 진영을 향해 동성애적 성향 자체까지도 정죄하는 옹졸한 집단쯤으로 매도하거나, 그 비난의 논리로 동성애 행위 자체를 성경적으로 비판하는 목소리를 부끄러운 것으로 여기는 일부 진보적인 크리스천들의 편파적인 이중 잣대는 동의할 수 없다.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바와 표현 방법이나 대응논리는 구분되어져야 한다. 방법론에 시비를 걸 수는 있으나, 그렇다고 동성애를 죄라고 말하는 교회의 입장이 틀린 것은 아니다.
6. 남녀의 결합으로 존속되어 온 가정이나 결혼 문제가 단순한 인권이나 정치적 판단의 대상 너머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동성애 문제 또한 단순히 정치적 쟁점화로 해결할 수 없는 좀 더 근원적이고 복잡한 논의가 필요한 사안임을 인정하고, 그에 따른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혹, 동성애자들의 입장이 정치 세력화하여 어떤 입법적 절차를 밟게 된다 하더라도 동성애라는 행위 자체를 태생적으로 혐오하는 사람들이 역차별 받지 아니할 권리와 인권 또한 보장되어야 한다.
부족하나마 이상이 필자가 동성애 문제를 고민하면서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부분들이다. 이러한 사안들을 기초로 동성애 문제를 대처하는 한국 교회의 대응 논리와 표현 방법론이 좀 더 심화되고 성숙되어져 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