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적 삶으로 더 나아가자
합신 교단의 정체성을 말하려면 낯익은 ~from ~to의 어법이 적절하다. 우리는 합동(총신)으로부터(from) 나왔다. 같은 개혁신학이요 합동이라는 이름을 동반했으니 교단적 궤도 비슷한데 우리는 어디로 가려고, 무엇을 위해(to) 나왔는가?
배운 신학과는 달리 개혁주의답지 않은 당시의 교권과 그에 갇힌 신학교의 어둠을 벗어나 진정한 개혁주의가 무엇인지 삶과 목회와 바른 신학교로 보여주겠다는 목표가 있었다. 따라서 합신의 정체성은 개혁주의적 삶이 무엇인가? 에 대한 대답에 있다. 바른 신학, 바른 교회, 바른 생활의 요점이 그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개혁주의적 삶을 살기 위해 부단히 힘써 왔다. 그런데 갈수록 많은 도전들을 이겨 내는 과정에서 개혁주의의 보루라는 의식과 책임감을 너무 무겁게 가진 나머지, 혹시라도 역사적 개혁주의 자체를 강조하는 데만 익숙해진 건 아닌지 한번쯤 돌아보자. 개혁주의에 대한 지적 포만감을 누리며 논리의 장비를 잘 갖추는 것과 실제로 개혁주의적 삶을 사는 건 다르다. 책을 수집하는 것과 읽는 것이 다르듯이 달리기 선수가 유니폼을 잘 차려 입고 달리기에 대한 풍성한 사전 지식을 갖춰 출발선에 늠름히 섰어도 달리지 않으면 아무 소용 없다.
가장 성경적인 개혁주의의 세례를 받고 행복한 신앙 체계 안에서 자기 위안을 누리더라도 실제적 실천적 개혁주의가 아니고서는 그것이 옳다는 증거가 빈약해진다. 언제든 어떻게 사는 것이 개혁주의인지 삶으로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날 성장세가 약화된 기독교는 믿음과 삶에 대한 고민과 논쟁에 직면해 있다. 이는 의도와는 달리 숱한 오류와 오해를 낳고 있다. 특히 한국의 상황은 더 심각해서 삶의 영성, 관상기도, 감각적 영성 등, 지식의 동굴을 벗어난 삶의 신학과 신앙을 말하는 풍조가 반응을 얻고 있다. 신학적 정체가 모호한 여러 운동들이 성행하고 개혁주의 동료들마저도 간혹 그런 류에 마음을 뺏기곤 한다.
왜 그럴까? 지행합일이라는 일반적 진리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개혁주의에 대한 지식은 많은데 정작 그대로 살아가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개혁주의적 삶의 전범을 많이 못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개혁주의는 소위 영성을 따로 말하지 않는다. 믿음과 삶을 이미 통합하고 있다.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적 통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고전적인 칼빈주의 세계관이 이를 잘 표현해 준다. 그럼에도 왜 우리가 배운 개혁주의와 실제 삶의 괴리가 오는가? 애초에 개혁주의를 제대로 못 배웠거나 배운 대로 사는 것을 여전히 주저하기 때문이다.
개혁주의는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의 지적 전유물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한 것이다. 성경에 기초하여 역사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일상의 모든 인격과 삶의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통치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진부하다고 하겠지만 개혁주의는 교회와 목회와 인간관계, 주방과 밥상, 일터, 학교, 독서, 학문, 예술, 놀이, 여행, 노사문제, 선거와 시민운동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하는 실제적 역사적 삶을 말한다.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교회사 속에서 신앙과 윤리라는 주제가 끊인 적은 없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는 이미 바울이 ‘복음과 복음에 합당한 삶’으로 명확히 제시한 바이다. 그런데 근래의 바울 신학 칭의론 논쟁에서 보듯 믿음과 삶의 일체성에 대한 반성과 강한 열망이 생긴 것은 한국교회의 위기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그렇더라도 예나 지금이나 돌파구를 다른 데서 찾으려 하면 결코 답이 없다.
오래됐는데 아직도 적실한 말이 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How should we then live?’ 프란시스 쉐퍼가 40년 전에 만든 영화와 책의 제목이지만 지금도 유효한 질문이 아닌가? 그 내용의 방대함과는 달리 쉐퍼의 결론은 간단하다. 성경만이 우리가 당대에 어떻게 살 것인가를 알려주는 분명한 관점과 그 해결책으로 이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위기나 어둠 속에서도 우리는 성경에 기초한 바른 신학으로서의 역사적 개혁주의의 등불을 버릴 수 없으며 그것이 혼돈의 교회를 비추는 것임을 확신한다. 그리고는 바른 생활이다. 결국 우리가 견지하는 개혁주의가 진짜임을 보여주려면 개혁주의적 삶이 수반되어야 한다. 사상과 변증의 도전이 극심한 세상에서 진짜를 진짜라고 가르쳐 전하는 일은 언제고 멈출 수 없다.
그러나 복음 전도가 그렇듯이 너무 말로만 강조하다 보면 괜한 의심을 유발하기도 한다. 진짜 좋은 제품은 적절한 선전과 더불어 실제 소비자의 경험에 의한 증거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따라서 마땅한 논리적 설득과 함께 진짜임을 의연하게 삶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개혁주의가 가장 올바른 대안이라면 한국적 상황 속에서 개혁주의적 삶이란 무엇인지 시간이 걸리더라도 모든 영역에서 연구하여 규명하고 증언하는 실천적 삶으로 더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너무 조급한 편이다. 당장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으면 의심부터 한다. 가야 할 길이 바르다는 확신이 있다면 인내하며 길게 내다보고 가야 한다. 지금까지도 애써 언덕을 잘 넘어 왔지만 비상한 시기에 우리는 개혁주의적 삶이라는 신호등을 다시 마주하고 있다. 푸른 등은 켜졌다. 주저 말고 함께 건너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