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와 복음주의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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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와 복음주의의 차이

 

   ‘개혁주의’는 항상 ‘역사적 개혁주의’를 동반한다. 여기에서 ‘역사적’이라는 말은 ‘전통적’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개혁주의’는 ‘잘못된 교회를 개혁해 가는 현실적 어떤 성향’으로 설명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개혁의 다양한 내용이나 방법 등 현실적 현상에 대한 해석을 동원 할 수밖에 없다. ‘역사적 개혁주의’는 칼빈주의와 같은 의미이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칼빈주의에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배경으로 하는 ‘인간의 전적 부패’, ‘인간의 전적 무능’, ‘하나님의 제한적 구원’ 등을 포함한다.

   개혁주의 신학에서 인간은 무능하고 부패한 존재여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가 아니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이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의미가 되는 구원에 대해서도, 죄악에 빠진 인간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한편 ‘역사적 복음주의’는 일반적으로 17세기 경건주의 시대를 배경으로 형성이 되었다. 이 복음주의는 16세기 종교개혁시대의 신앙정신이 점차 세월을 따라 경직되고 제도화되어 갈 때 독일에서는 발생한 경건주의 운동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경직되고 제도화된 기독교에서 좀 더 삶에 밀착된 실질적인 신앙을 필요로 하다고 판단한 것이 경건주의를 낳게 했다면 이러한 편의적인 복음 이해를 추종하려는 일단의 움직임이 오늘날 복음주의를 낳게하였다.

   사실 경직된 기독교를 활성화된 삶의 종교로 회복하고자 한다는 점에서는 매우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정신도 또다시 시간이 흘러가면서 점차 인본주의적 성향을 띠게 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 결과 복음주의에서는 개혁주의에서 주장하던 인간의 전적 부패, 전적 무능, 제한적 구원에 대한 일종의 변질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했지만 그래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만한 일부는 남아있다’든지, ‘인간이 전적으로 무능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열심히 전도하여 다른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다’든지, ‘하나님의 제한적 구원이 아니라 인간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는 좀 더 많은 사람들을 구원시킬 수 있다’는 해석이 바로 오늘날 복음주의가 낳은 사생아들이다.

   우리는 칼빈이 이단으로 정죄했던 알미니안주의 사상을 포함하고 있는 복음주의 사상들을 철저하게 배격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