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대화가 있는 공동체의 밝은 미래_가정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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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가 있는 공동체의 밝은 미래

< 가정호 목사, 세대로교회 >

“풍부하고 넉넉한 대화는 공동체의 의미와 존재의 기쁨 누리는 선물”

   이제 막 사물에 관한 호기심이 생긴 아이들은 쉬지 않고 질문한다. “엄마 이건 뭐예요? 아빠 이건 어떻게 하는 거예요?” 호기심을 가득 담은 질문을 계속하는 귀여운 아이들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이런 질문과 호기심이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 발전되었다면 우리나라의 어른들은 어떤 어른들이 되어 있을까?  

   어린아이 때는 모두 천재에 가깝도록 신동이다. 그런데 조금 씩 성장하면서 질문을 하지 않는다. 청소년기가 되면 대부분의 아이들이 말하는 것을 귀찮아한다. 무표정과 무감각이 일상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성인이 되어 자신을 돌아보는 어느 날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는 자신의 바보스러움에 심한 고통을 느낀다.  

   요즘 청소년들은 부모와 함께 어디를 가는 것은 서로 부담스러워한다. 우리나라에서 청소년들이 부모와 쾌활하게 웃으면서 거리를 힘차게 걷는 모습을 보는 일은 쉽지 않다. 가정도 교회도 학교도 국가도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아이들에게 말을 거는 것이 무서운 형편이 되어 가고 있다.  

   어디에 무슨 일로 가정을 방문하여 자녀들에게 말이라도 걸어 볼라치면 “그냥 놔두세요. 그 아이 지금 예민해요…” 이렇게 말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이 보편화된 아픔을 자연스럽게 여기는 것이 과연 건강한 것일까? 아이든 어른이든 서로 간에 대화하기가 부담스러운 가정, 학교, 나라의 형국, 교회의 분위기, 총회의 상황들이 과연 올바른 것일까? 

   삼삼오오 모여서 의견을 나누고 생각을 교환하며 집담회 같은 모임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분위기를 만들어 갈 수는 없을까? 아이들이 더 적극적으로 부모와 어른들과 같이 다니고 싶은 분위기를 만들 수는 없는 것일까? 선후배간에 흉금 없는 의견교환과 토론분위기를 만드는 일이 그렇게 힘든 일일까? “아이들은 어디 갔나요?”, “이제 아이들이 안 따라 다니려고 해요.” , “그렇지요 이제 사춘기니까요!” 나도 너도 서로 잘도 알아서 생각하고 선언한다. 어리석음이다.

   왜 우리는 이렇게 된 것일까? 왜 함께 다니지 아니하고 서로 독립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기는 분위가 되었을까? 거기에 무슨 깊은 함정이 도사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왜 어떤 나라에서는 3대가 같이 웃고 떠들면서 거리를 활보하고 같이 앉아 음식을 나눠 먹으면서 왁자지껄하게 의사소통을 하고 사춘기도 모르고 지내고 자기살해(자살) 같은 것은 생각도 하지 않으면서 기쁨으로 청소년 시절을 지내는 것일까? 이 나라의 아이들이 입을 다물고 더 이상 말하지 않는 이유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해결책은 없을까?

   자기 의견을 스스럼없이 표현하는 사람으로 자라나게 하려면 어떻게 관계하며 도와야 할까? 비록 내 의견, 네 의견이 조금 문제가 있을지라도 그 의견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하여 의사를 소통하고 또 조심스럽게 개진된 의견들을 함께 검토하고 의논하는 분위기가 좋지 않을까?
부족한 의견일지라도 그 의견을 논의하고 수렴하는 과정에서 더 탁월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효과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회의는 빨리 끝낼수록 좋은 것이 아니라 제대로 진행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비록 길고 더딜지라도…

   미숙한 의견이나마 어떤 이가 개진한 그 용기를 격려하고 박수쳐 줄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갈 수는 없을까? 이 땅에서는 어른이 되어서도 침묵이 미덕이 되어 입을 꽉 다물고 더 이상 말하지 않는 것을 성숙함이라고 좋아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다.

   언어와 침묵에 관한 전문가인 막스 피카르트는 “침묵은 언어를 길어내는 깊은 샘과 같다”(막스 피카르트, 까치. 1996)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분명 침묵이 주는 미덕이 있다. 그러나 오직 침묵만이 오직 미덕일까? 불의와 악에 대하여 침묵하는 것은 죄에 동조하는 것이다.

   거룩한 침묵은 금이지만 더러운 침묵은 적극적인 패악이다. 따뜻하고 허심탄회한 대화, 깊은 사색의 세계까지 고려하는 진지한 대화를 원하지만 쌍방 간에 소통보다는 일방적인 훈계나 선포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깜짝 깜짝 놀란다. 일방적으로 잔소리나 해대는 부모나 리더를 좋아 할리 없다. 그런 공동체나 기관들이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받들거나 귀한 소출들을 낼 수 없을 것이다.

   질문하고 응답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앎의 희열과 이해의 기쁨은 육신의 욕망으로 얻는 쾌락과는 전혀 그 질이 다른 하늘의 쾌락이다. 소통의 기쁨은 소속감과 연합의 기쁨으로 가득 채워진다. 소통의 기쁨을 잃어버린 채 어떤 기대도 없이 회의석에 장시간 강요된 침묵 가운데 앉아있는 것은 감옥과 별반 다름이 아니다.

   이 땅에서는 희한하게 성인이 되면 문제에 대한 본질과 근본적인 원인들을 살피기보다는 알아서 생각하는 경향성이 자라난다. 질문과 대답이 없다. 올바른 질문을 하기 위해 고민하는 과정도 없다.

   이런 보이지 않는 큰 장벽을 넘어설 수 있다면 너무 좋겠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어떤 모임들에서 질문의 유익과 질문이 가져다주는 공동체적 성숙에 대하여 활발한 교통이 이루어 졌으면 좋겠다. 교회에 질문이 있는가? 원활하고 빈번한 질문과 대답이 이루어지고 있는가?

   뭔가 꿍꿍이속이 있는 사람들처럼 서로 딴 생각을 하고 딴 의도를 가지고 자신의 것을 관철하기 위해 힘을 키우고 있는 것은 아닌가? 목회자나 설교자들은 성도들이 어떤 질문을 가지고 있는지 직접 들어보는 일에 익숙한가? 성도들은 또한 목회자가 무슨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지 질문하고 들어볼 여유가 있는가? 총회주간이다. 총대와 사회자가 서로 소통하기 위해 빈번한 의견교환을 하고 있는가?

   총회에 상정한 헌의문서들을 가지고 노회가 소통을 충분히 했는가? 노회의 회원들이 먼저 모여 헌의문서가 가진 의도와 내용, 그 헌의가 통과, 또는 보류, 거부 되었을 때에 어떤 대안을 가지고 대처하여야 할 것인지에 대한 충분한 의견교환이 있었는가? 오히려 불합리한 질문, 수준에 합당하지 않은 질문이 나올까봐 걱정이 앞서는 것은 아닌가?

   충분한 대화, 넉넉한 대화는 소속한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삶의 보람, 공동체의 의미, 존재의 기쁨을 누리는 선물이다. 포기하지 말고 계속해야 할 일이다. 아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에게 자기가 아는 것을 겸손히 알려주고 모르는 사람은 아는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물어보면서 배우려는 일상이다.

   흉금 없는 대화가 꽃필 때 조직이나 기관, 그 어떤 모임이든 의미가 있고 미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