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이미 ‘무엇’이다
– 갈라디아서 1장 11-24절
<김근배 목사, 동해참빛교회>
“율법조차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뒤에 설 때만 효과가 있을 뿐”
- 들머리(발단)
그리스도께서 이룬 복음에 유대교 전통을 덧씌우려는 ‘거짓’ 형제들 때문에 바울이 화났다.
유대교 전통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들을 죽여 놓고 도리어 유대인 조상 랍비들이 옛언약들(구약)을 재구성해서 재정립한 그들만의 문화이다. 하나님께서 보낸 ‘참사람’이 해낸 복음에다가 하나님의 참사람을 죽인 사람들이 만든 유대교 전통을 교회에서 함께 받겠다고 하니 화날 만 하다.
유대교 전통에서 만들어낸 랍비들의 율법 말고, 하나님께서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해 계시하신 ‘율법’에 대해 고민해보자. 이 율법조차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뒤에 설 때만 효과가 있다. 율법은 복음 옆에 설 수 있는 무엇(존재)이 아니고 복음 뒤를 받쳐주는 어찌함(도덕교훈)이다.
모세가 받은 율법에는 ‘시민법, 의식법, 도덕법’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중 ‘시민법과 의식법’은 유대국가의 것인 반면 ‘도덕법’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것이다. 유대 ’국가’와 유대’인’을 구별해야 했다.
- 주제(전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인’으로 이루어진 교회들(1:22)이 자기 변화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 돌렸다고 말한다. 그들(1:22)은 유대인, 예수를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인 ‘그리스도 안’의 유대인이다. 그들이 그리스도 십자가 복음을 전면에 내세우고 유대교 전통에서 떠났다. 이런 사람들을 바울은 4장에서 ‘종’이 아니요 ‘아들’이(4:7)라고 말하고, ‘여종의 아들’이 아니라 ‘자유본처의 아들’이(4:31)라 말한다. 곧 ‘이스마엘’이 아니요 ‘이삭’이며, ‘하갈’이 아니며 ‘사라’라는 것이다.
- 전개(위기)
그런데 왜 사라가 하갈을 섬기며, 이삭이 이스마엘이 되려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바울은 가슴을 친다. 이것은 다시 천박하고 자유도 없는 종으로 되돌아가서, 종들이 주인을 위해 잔치 날인 날(days)과 달(months)과 절기(seasons)와 해(years)를 준비하며 애쓰는 것(4:10)이라 한다.
“왜 율법에 다시 종노릇하려고 하는가, 왜 율법으로 주인에게 의를 얻으려 하는가, 왜 교회 안에 유대교 (또는 로마 가톨릭) 전통을 다시 들여놓으려 하는가?”라고 바울이 묻는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1:4)은 우리로 하나님에 대해서 살아나게 하시려는(2:19) 희생이시다. 하나님께서 계신 집에 되돌아가서 아들로 살라는 몸짓이시다. 저들은 이런 희생과 몸짓을 헛되게 만들어버렸다(2:21).
- 증거(절정)
교회는 막 하나님께 살아난 자녀들의 쉼터이다. 비인간(죄인)이 참인간(의인)으로 회복하며 치유 받는 집이다. 내 ‘어찌함’ 탓에 흉악하게 변했던 ‘어떠함’이 그리스도 덕분에 ‘무엇’이 되어 들어올 수 있었던 ‘하나님 가정’이다.
하나님 가정은 그리스도 복음 안에서 ‘무엇’인 자녀들의 가족모임이다. 율법은 이 가정모임에서 대화와 노래며 춤과 웃음을 주는 어찌함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하나님 아버지의 근엄하신 소리이다.
- 마무리(결말)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근엄하신 소리를 즐겁게 경외하는 아들(거듭난 존재)이다. 어찌 종이 그 자리에 낄 수나 있겠는가? 종의 삶(의식)이 좋아보일지 몰라도, 하갈이 먼저 출세(자녀 낳음) 해서 힘들지 몰라도, 우리는 사라(거듭난 자유인)이다. 이스마엘이 빨리 장성(성공) 했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삭(믿음의 후손)이다.
기다리자. 율법에 매여, 다시, 그 옛날 내 어찌함 탓에 흉악했던 그 어떠함으로 되돌아가려는가? 자유하자.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사람이기에. 그리고 즐겨보자. 도덕법에 따라 덕스럽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