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이 달라져야 한국교회가 산다
< 강경민 목사, 일산은혜교회 >
“말씀을 온전히 분별하여 가르치고자 했던 정신을 계승해야”
합신에 입학했을 때, 합신의 신학적 관심사는 “하나님나라”였다. 얼마나 흥분했는지 모른다. 세계 역사는 하나님의 구원역사 아래 종속되어 있다는 것,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펼쳐지는 곳에 하나님의 정의, 인애, 정직이 넘쳐야 하고 넘치게 된다는 것, 이것이 내가 이해하는 하나님나라 신학의 골자였다.
하나님나라 신학은 구원과 역사를 이원화 하지 않았다. 바울 사도는 복음과 하나님나라를 거의 동일한 의미로 생각했기 때문에 이 두 개념을 교차적으로 사용했다(행 20:24-25, 28:28-31).
바울은 성부·성자·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것으로 한 영혼의 구원을 완성했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예수님의 말씀을 다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충실했다. 주님께서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치는 일에 전력했다. 합신 입맛에 맞는 것만 아니다. 장로교 신학에 맞는 것만 아니다. 다이다. 모든 것이다.
루터, 칼빈, 카이퍼. 박윤선…, 이런 분들은 어찌하든지 주님의 교훈을 치우치지 않고 다(모두) 가르치려고 몸부림쳤던 선구자들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가르치지는 못했다.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선진들에게서 하나님 말씀을 온전히 분별하여 가르치고자 했던 정신을 계승해야지, 선진들의 신학적 틀에 갇히는 것은 절체절명의 정신으로 배격해야 마땅하다.
내년이면 종교개혁 500주년이다. 종교개혁의 정신이 화석화 되지 않으려면 500년 전, 당시 종교개혁 주창자들의 정신과 주장이 개혁되어야만 한다. “Protestant always protest”라 하지 않았던가. 우리 교단과 합신의 신학적 토양은 지금 어떠한가?
어느 누가 칼빈이나 박윤선의 성경해석을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 신학을 송두리째 부인하라는 뜻이 아님은 열한 살 베기도 알만한 말이다. 문제는 칼빈이 말했고, 박윤선이 말한 것이라면 거의 신성시 되는 신학적 폐쇄성이다. 뿐만 아니라 그런 자세로 신학하는 정신이 문제다.
예컨대 어떤 교수는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 하신 말씀을 오직 〈구원의 범위〉에만 국한시켰다. 구원 받는 대상은 인종이나 문화적 차별 없이 적용된다는 뜻으로만 그 말씀을 해석하고 이해한 것이다.
옳은 말씀이다. 그러나 그 말씀의 능력이 거기서 그치는 것일까? 당시 사회적 상황(세상의 가치관)이 어떠했는가? 헬라인과 유대인, 종과 자유인, 남자와 여자, 얼마나 그 차별의 간극이 심원했는가!
그러므로 바울 사도의 천부적 인간선언이 사람들의 생각과 사상을 변화시키는 데 너무나 오랜 세월이 흘렀던 것은 사실이지만 마침내 그 말씀, 그 사상의 능력(위력)이 작동하고 열매를 맺어 인류역사를 변혁시키지 않았는가? 누가 노예해방과 기독교정신은 아무런 관계없는 역사적 우연이었다고 주장하겠는가? 바울 사도는 이미 말씀의 능력, 구원의 영향력을 만천하에 명백히 선포했었다.
“너희가…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3:9).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하나님의 공의와 인애와 정직이 충만해져야 하는 것이 하나님나라 신학의 당연한 귀결이다. 인간이 우둔하여 그 역사가 늦어질 뿐이다. 합신 신학은 일찍이 하나님나라 신학에 눈을 떴고, 하나님나라 신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언제부터인가 그 신학이 관념화되어버렸고, 교회 안의 신학으로 영역축소가 되어버렸다. 안타까운 일이다.
세상이 무서워서였을까? 출세한 교직자들과 성도들이 싫어해서였을까? 합신의 성경윤리는 개인적 윤리나 교회생활만의 종교적 영역으로 쫓겨나 버린 지 오래다. 신학의 개혁 없이 교회개혁은 불가능하다. 교회개혁 없는 사회개혁은 피 흘림을 요구하는 혁명의 과정이 있을 뿐이다.
역사적 의미의 개혁주의라는 신학의 틀이 우리로 하여금 성경을 바르게 통찰할 수 있는 안목을 제시한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나 어떤 전통도 어떤 신학도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드러낼 수 없다.
칼빈, 카이퍼, 박윤선이 남긴 그 거룩한 유산을 굳게 붙잡고 새로운 신학을 탐구하는 정신이 살아나야 한다. 우리가 얼마나 기존 신학의 틀에 안주하고 있는가를 통렬하게 반성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