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영광을, 하나님을 영화롭게
< 변세권 목사, 온유한교회 >
“인간은 완전히 타락한 존재인 까닭에 밝히 주어진 진리를 보수하는 일에서조차도 치명적으로 무능력하기 마련”
복음은 그 성격상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수단과 방법조차도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진리를 포함한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 인생의 본분이다. 이 본분을 이루는 방편과 수단으로 성경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이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 자체로서의 권위를 지니고 있다.
성경은 하나님은 말씀이다. 따라서 교회는 성경의 권위에 절대적으로 순복하여야한다. 이렇게 될 때에 하나님은 영화로워지실 것이며 우리는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있는 것이 된다.
성경을 충실히 따르는 개혁파 신학은 하나님 앞에서의 사람을 생각할 때에 항상 잊지 말아야 할 전제가 있음을 선포한다. 그것은 인간의 전적 타락문제이다. 아담 안에서 옳다고 생각되는 방식대로 하나님을 섬기게 되면,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다고 하는 이 중요한 사실로 말미암아, 필연적으로 갖가지 타락한 경배형태에 빠져 버리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철저하게 부패했기 때문에 성경을 주셨고, 따라서 우리는 신앙을 진행함에 있어 성경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는바 ‘계시의존사색신앙’ 원리를 추구해야 하는 존재론이 되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경이 가르치는 방법과 수단을 불변의 법칙으로 알아야한다.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하여 발생시키기 마련이고, 그로 말미암아 발생된 교회는 성경의 사명을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성경의 결과가 교회이며, 교회는 성경에 근거하여 성립한다.
또한 성경은 부족한 것이 없으며, 완전하며 충족하다. 그러므로 교회는 무익한 호기심에 이끌려 자꾸 새로운 것을 계발하거나 개발하려 들지 말고 이미 수립되어있는 원리에 보다 더 충실하려고 노력해야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완전히 타락한 존재인 까닭에 밝히 주어진 진리를 보수하는 일에서조차도 치명적으로 무능력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신학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보수적이어야 하며, 실천에 있어서 철저하게 개혁적이어야 하는 것이다.
다만 여기서 우리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아감에 있어서 조심해야 할 좀 더 깊은 부분에 대하여 확인 할 것이 있다. 이것은 ‘개인적 경건’을 띠는데서 멈출 일이 아니다. 교회 생활에 있어서 개인주의는 그것의 성격의 어떠한 여부를 떠나서 절대적 금물이다.
사실 오늘날의 교회가 너무 처참할 정도로 밑바닥까지 떨어져 버렸고, 이런 상황에 놓여 있다 보니, 어쩌다 남다른 인품과 경건성을 구비한 사람을 보게 되면 우리는 한결같이 그것을 대단히 높게 평가하게 된다. 그리고는 비록 작심삼일로 끝날지언정, 저마다 자극을 받아 새로운 각오와 결심 속에서 경건한자로 자라가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그렇지만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러한 경건주의는 다른 한편으로 큰 오류를 낳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경건은 개인의 영성을 고양하는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 물론 이것은 완전히 배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개인의 경건은 교회를 이루는 질적 성장에 이바지하는 것으로서 나타날 때에 참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교회를 섬기는 봉사의 성격을 띠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경건이 교회로 하여금 교회되게 하는 일에 이바지 되지 아니하면, 그 경건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17세기에 발생하였던 방식으로 개인적 경건주의의 모습을 답습하면 안 된다. 이런 식의 영웅적 경건주의는 교묘하게 교회 안에 계층과 불화를 조장하게 된다.
진실로 성도란 복음 안에서 개인이기 전에 단체로서의 교회이며, 이 전체성 안에서 한 부분의 자리에 있다. 따라서 참된 경건 혹은 경건의 본질은, 자신의 속한 교회가 좀 더 교회다운 모습으로 자라가도록 하는 데에 있고 교회의 성숙에 이바지할 때 나타나는 것으로 발견되는 것이다.
성경은 교회원 개개인에게 위탁된 것이 아니라 사실상 교회공동체에 위탁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참된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우리는 그 안에서 신자의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