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자_정재근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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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자

 

정재근 장로/ 전북노회 배광교회

성경은 우리에게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라고 명령한다(엡 5:19, 골 3:16). 헬라어 성경에서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는 시편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개혁교회의 첫 완전한 시편 찬송을 출간했던 종교개혁자 칼뱅은 “예배의 중심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예배에 다른 요소는 불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공예배에서 악기 사용도 금했다. 시편 찬송 전통은 미국 교회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미국에서 최초로 출간된책 역시 시편 찬송집 ‘베이 시편 찬송집’이었다.

최근 우리 교단 내에서도 공예배에서 새찬송가 대신 시편 찬송가를 채택하는 교회가 늘고 있다고 한다. 배광교회는 공예배에서 시편 찬송 가(150편)와 개혁 찬송(85장)을 사용한 지 6년 째다. 새찬송가와 복음성가를 부르며 기타 등다양한 악기를 사용하다가 시편 찬송가로 전환한 초기에는 다소 어색함이 있었다. 시편 찬송 가는 음악적 기교가 적고 단조로운 선율이 많으며, 가사가 성경 시편의 내용을 그대로 담고 있어서 인간적 감정 자극은 거의 없다. 시편의 가사는 모두 하나님을 찬양하는 말씀이며, 성도들은 이를 믿음으로 받아 회중 찬송으로 드리고 있다. 말 그대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 라는 본래의 의미가 살아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시편 찬송이 중요한가? 시편은 우리의 영혼과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게 하는 하나님 말씀의 노래이기 때문이다. 예수님 또한 시편을 찬송하셨다.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이 규정한 방식대로 예배받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96문에서 하나님을 형상으로 표현하거나 하나님께서 명하지 않은 방식으로 예배드리는 것을 금했다.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의 출발점도 살필 필요가 있다. 삼위일체를 부정했던 아리우 스가 자신의 주장을 퍼뜨리기 위해 찬송을 만들었고, 도나티스트 역시 이단적 교리를 지키기 위해 찬송을 만들었다. 반면 칼뱅, 마르틴 부처, 베자 등 종교개혁자들은 모두 시편만을 불렀다.
오늘날 장로교회에서 기타·드럼 등 악기 사용이 확대되는 상황을 생각할 때, 우리는 다시 한번 예배의 본질을 돌아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요소만으로 예배드리고자 한다면, 성경이 가르치는 예배 방식에 대해 진지한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다. 제2계명 역시 하나님을 예배할 때 인간이 만든 이미지나 도구를 섞어서는안 된다고 명한다. 인간적 취향이나 감정에서 비롯된 예배 방식은 결국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칼뱅은 1543년 시편 찬송집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공적 기도에는 말로 드리는 기도와 노래로 드리는 기도가 있다. 음악은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열심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있다.

그러나 노래는 경박하거나 경솔해서는 안 되고 장중하고 위엄 있어야 한다. 집에서 즐거움을 위해 부르는 노래와,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서 부르는 시편은 매우 다르다. 그러므로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다윗의 시편만큼 하나님 찬송에 적합한 것은 없다.”

루터와 칼뱅이 시작한 종교개혁은 이미 끝난 운동이 아니다. 오늘의 교회는 그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예배의 본질을 붙들어야 한다. 이제 장로교회는 개혁자들의 가르침을 따라 예배 속에서 회중의 노래, 곧 하나님 말씀이 담긴 시편 찬송을 다시 회복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