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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기다리는 사람

장홍태 선교사 GBT 경북노회 새비전교회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 (Waiting for Godot, 1952)는 연극사에서 대표적인 ‘부조리극’으로 꼽힌다. 작가가 이름 붙인 ‘고도’가 무엇을 뜻하든, ‘기다림’을 인간 존재의 허무와 부조리의 중심에 둔 것은 우울하 면서도 의미심장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것은 당시의 시대적 정황과도 맞닿아 있다. 작품이 발표된 해는 2차 세계대전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던 시기였다. 약속과 희망이란 말이 무색할 만큼 인류는 깊은 상실과 회의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무대 위 인물들은 ‘고도’가 누구인지, 왜 기다리는지도 모른 채 우스꽝스 럽고 공허한 대사를 주고받는다.

그렇다면 오늘은 조금 다를까? 전쟁의 참화를 딛고 기술과 문명이 극적으로 발전한 이 시대에 과연 ‘기대와 기다림’의 허무는 사라졌을 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성공한 투자자라 불리는 워런 버핏(Warren Buffett), 하워드 막스(Howard Marks), 피터 린치(Peter Lynch) 같은 이들도 공통된 조언을 남긴다. “시장을 예측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즉, 상승장이든 하락장이든 예측과 기대 자체를 포기하라는 말이다. 20세기 중반의 ‘고도’처럼 정체조차 모를 대상을 기다리던 시대나, 각종 경제·문화 지표를 세밀히 분석할수 있는 지금이나, 기다림의 불안과 피로는 여전히 사람들에게 가혹하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기다 리라’고 명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그 기다림의 대상과 본질은 무엇일까? 하박국 선지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 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합 2:3). 세월이 흘러 히브리서 10장은 이 ‘묵시’를 한 인격적인 존재, 곧 ‘오실 이’로 해석한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계시의 완성이 시대를 거치며 점점더 분명히 드러났고, 그 실체가 바로 그리스도 이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2장에 등장하는 시므온과 안나는 바로 그 기다림의 성취를 본 사람들이다. 노년에 이르기까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이스라 엘의 위로를 기다리던 그들은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찬송한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눅 2:29~30). 하박국이 들었던 하나님의 약속은 이렇게 완전하게 이어진다. “의인은 그의 믿음 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 즉,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때까지 기다릴 수 있게 하는 힘은 ‘믿음’이다.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무엇을 기다리는 것은 세상 지혜로 보아도 부조리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 기다림에는 약속도, 보증도, 믿음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기다리는 사람은 복되다. 그 기다림은 헛된 기대가 아니라 ‘바라는 것들의 실상’(히 11:1)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이루신 구원의 현실은 아직 우리의 눈에 온전히 드러나지 않았지만, 믿음은 그 감추인 영광을 현재의 실재로 받아들인다. 아직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약속’이지만, 믿음으로 누릴 수 있다는 점에서는 이미 ‘성취’ 다. 제대로 기다리는 사람은 믿음으로 기다리는 사람이다.